산업 중소기업

[현장르포] 하루살이로 전락한 충무로 ‘인쇄골목’

김미희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3.12.09 17:52

수정 2013.12.09 17:52

지난 6일 서울 충무로 인쇄골목. 불황의 짙은 안개가 지속된 탓에 대부분 업체의 기계는 멈췄고 '임대 문의' 광고지를 붙여놓은 곳도 많았다.
지난 6일 서울 충무로 인쇄골목. 불황의 짙은 안개가 지속된 탓에 대부분 업체의 기계는 멈췄고 '임대 문의' 광고지를 붙여놓은 곳도 많았다.

지난 6일 서울 충무로 인쇄골목. 명보아트홀(옛 명보극장)을 중심으로 뒷 골목 사이사이에는 각종 인쇄업체들이 빼곡히 붙어 있다.

중국발 미세먼지로 인해 더욱 탁해진 겨울을 지내는 인쇄업자들의 한숨은 깊어지고 있다. 대다수 업체들의 기계는 멈춰 있고 문이 굳게 닫힌 곳도 많다.

인쇄업종에서 30년 넘게 몸담아온 임모 사장(50대 중반)은 10여년 전부터 불황의 그늘이 드리워졌다고 전했다.

그는 "경기 침체 속에 그나마 기대왔던 정부 입찰물에 가격 경쟁력을 내세운 국내 대형 제지업체들이 뛰어들면서 다른 일거리를 받아 하루살이처럼 기계를 돌리고 있다"고 말했다. 지난 1997년 외환위기 당시보다 체감경기가 더 어렵다는 게 그의 전언이다.

임 사장은 "특히 부동산 경기가 안 좋아지면서 젖줄이던 아파트 분양 카탈로그 물량이 3분의 2 가까이 줄었다"며 "요즘은 농기계 카탈로그나 은행권의 안내장들을 찍어내며 하루하루 버티고 있다"고 밝혔다. 이어 "최근에는 대형마트들이 기존 광고 전단지를 신문의 전면광고로 대체하면서 관련 주문량이 아예 없다"고 덧붙였다. 이처럼 주문량은 감소했지만 원자재값이나 인건비 등은 모두 올라 매월 적자를 보는 상황이다.

골목 하나를 돌아서자마자 마주친 A인쇄소는 '하청'이란 글자를 크게 붙여놓았다. 이 인쇄소 직원은 "예전에는 우리가 주도해서 기획도 하고 디자인도 했는데 요즘엔 원청업체 광고기획실 디자인팀이 넘겨주는 것을 그대로 찍어내는 수준"이라고 말했다.

특히 이들은 '나까마(중개 소개업자의 비속어)'의 횡포를 한목소리로 비판했다.

임 사장은 "원청업체와 우리들 사이에 나까마가 끼는데 이 사람들의 장난이 매우 심하다"며 "중간에서 고액의 수수료를 떼는가 하면 아예 가로채는 경우도 종종 있다"고 지적했다.

A인쇄소 직원도 "요즘에는 정부에서 나온 사람들이 나까마를 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들에게는 전관예우식으로 할당되는 물량이 있는 것 같더라"고 귀띔했다. 게다가 외국인 관광객을 위한 안내 지도나 홍보물을 총괄하는 한국관광공사 등 정부 측 인쇄물은 대부분 비영리단체들이 하고 있어, 그나마 '떡고물'이라도 확보하려면 이들 '나까마'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B인쇄소에 지류를 배달하던 한 노인은 "예전에는 우리끼리 우스갯소리로 기계가 돌아가면서 '5원 5원 5원(한 장당 마진)'하네 그랬는데, 요즘엔 '1원 1원 1원'으로 바뀌었다"며 "그나마 과거 연말 특수 등이 있을 때 돈을 번 공룡 인쇄소들은 대부분 경기 파주시 출판단지 등으로 갔기 때문에 여긴 정말 영세한 사람들뿐"이라고 전했다.

예전에는 24시간 기계가 돌아갈 때도 있었지만 지금은 주 5일 근무의 공공기관처럼 평일 저녁은 물론 주말에는 적막강산이란 전언이다.

이들을 더욱 답답하게 하는 것은 이 같은 어려움을 호소할 곳이 없다는 점이다.

오프셋 인쇄를 전문으로 하는 C인쇄소 관계자는 "대부분 외상거래나 어음으로 결제하기 때문에 큰 손해를 본 적도 많다"며 "지난 2011년 조달청이 인쇄기준요금까지 폐지하면서 불공정 사례들이 더 늘었지만 관련 조합에도 못 들어갈 만큼 영세해 악 소리 한번 내지 못한다"고 말했다.

elikim@fnnews.com 김미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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