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경제단체

기업 구조조정 ‘각본’ 있었다

안대규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09.06.12 09:55

수정 2009.06.11 22:24

11일 채권금융기관에 따르면 지난주 모은행 여신담당자에게 금융당국으로부터 ‘공문성’ e메일이 날아왔다.

이 은행 담당 직원이 한달여간 공을 들여 평가한 대기업의 신용위험평가 결과를 지난달 말 금융당국에 통보했으나 돌아온 것은 ‘구조조정(C)등급 평가 권고 기업 명단’이었다.

금융당국이 미리 선정한 ‘시나리오 살생부’대로 재평가해달라는 얘기다. 이는 금융당국의 ‘C등급 평가 권고 기업 명단’에는 어떠한 조건도, 평가기준도 베일에 가려져 있었다. 구조조정을 했던 채권금융기관은 그저 금융당국의 요구대로 요식행위만 한 셈이었다.

이 은행 여신담당자는 “오랫동안 기업을 지켜보고 기업구조조정촉진법과 채권단 상시협약에 따라 정기 및 수시평가를 진행해온 채권단의 의견을 묵살하고 기업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하는 금융당국이 특정 기업을 C등급 권고 기준안에 넣어 구조조정 압박을 가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 관계자는 “이는 금융당국이 이미 구조조정 및 퇴출 기업의 ‘결과치’를 만들어놨다는 얘기”라고 토로했다.

채권금융기관은 기본평가에서 ‘불합격’진단을 받은 434개 평가 대상 대기업에 대한 옥석가리기 차원에서 우수등급(A, B등급)과 부실우려(C등급), 퇴출(D등급)을 지난달 말 가려 금융당국에 통보했다.

이달까지 장장 6개월에 걸친 기업구조조정 신용위험평가가 마무리되기는 했지만 금융위원회가 기업 구조조정이 속도만 강조한 나머지 ‘알맹이 없는 꿰맞추기식 졸속’평가로 이뤄졌다는 게 채권금융기관 관계자들의 증언이다.

이미 단기실적주의를 벗어난 은행권과 달리 금융위원회 등 당국은 여전히 ‘전시행정’을 강조하며 청와대에 보고하기 위한 ‘실적 채우기’에 급급한 나머지 구조조정 과정 곳곳에서 ‘부실’을 낳은 결과의 산물인 셈이다.

한편, 채권단에 따르면 지난 10일에는 H은행과 B은행이 금융당국으로부터 꽤 유명한 모 대기업들에 대해서 왜 구조조정(C)등급으로 안내리냐고 질책성 권고를 받았다. 실제 두 은행은 해당 대기업의 주채권은행으로 점검 결과 모두 양호해 B등급을 내렸던 것이다. 이에 한 은행은 마지못해 다른 채권단에 ‘C등급에 대해 동의하느냐’는 기업구조조정촉진법상 없는 동의 절차를 만들어 가까스로 C등급으로 내렸다. 또 여기에 금융당국까지 나서 다른 은행에 ‘주채권은행도 C등급으로 매겼는데 너희도 C등급으로 결정하라”고 ‘종용’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 밖에도 채권단에 따르면 지난 4월 건설·조선 구조조정 과정에서는 두 은행이 금융당국으로부터 “다른 은행들은 모두 구조조정 및 퇴출 등급인 C등급 건설사가 2∼3곳 이상 나왔는데 너희 은행은 왜 없느냐”고 윽박질렀다는 것이다. 이에 두 은행은 할 수 없이 멀쩡한 우량 건설사마저 C등급으로 강등시켰다.
그러나 신용위험평가 발표 결과 이 두 은행은 금융당국이 당초 비교한 은행보다 C등급을 많이 지정한 것으로 밝혀졌다.

/powerzanic@fnnews.com 안대규기자

fnSurve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