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학·과학 과학

‘라이프로그’..생활 속 영상·정보·행동 담아주는 ‘인체 블랙박스’

이재원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09.02.01 17:56

수정 2009.02.01 17:56


아침 6시. 직장인 김범진씨(34)를 깨우는 자명종 소리가 요란하다. 주류회사 영업사원인 김씨는 어젯밤 비즈니스 때문에 폭음을 했다. 무거운 몸을 이끌고 회사로 향하던 김씨의 머릿속에 갑자기 오전에 회의가 있다는 사실이 떠오른다. 김씨는 허둥지둥 집으로 돌아와 회의 자료가 담긴 가방을 찾아봤지만 보이질 않는다. “술집에 두고 왔나. 택시에 놓고 내렸나.” 발만 동동거리던 그는 ‘어젯밤 일어난 일을 영화처럼 돌려 볼 수만 있다면’ 하는 상상을 하면서 다시 출근길에 올랐다.

김씨의 이 같은 바람은 머지않아 실현될 전망이다.
‘라이프로그(Lifelog)’의 출현이 예고되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 배창석 박사는 1일 “자신의 일상을 기록하려는 욕구가 날로 높아지면서 이를 뒷받침할 차세대 기술들이 속속 개발되고 있다”며 “지금까지 불가능하다고 여겨졌던 ‘모든 일상의 자동 기록’이 가능해질 전망”이라고 말했다. 현재 국내에선 ETRI와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등에서 관련 기술 개발이 한창이다. 제품을 만들어 성공적으로 시연도 했다.

■나의 하루를 ‘백업’한다

라이프로그는 우리가 하루를 기록하기 위해 일기를 쓰는 것처럼 디지털 장치에 하루 동안 일어난 일에 대한 각종 정보를 담는 것을 말한다. 차이가 있다면 문자로 표현하는 일기와 달리 오디오나 비디오, 위치, 환경, 생체정보 등 다양한 분야의 정보를 담는 것이다.

카메라가 장착된 안경은 눈으로 보는 모든 영상을 수집하고 목걸이에 부착된 마이크와 위성항법장치(GPS)는 소리와 위치정보를 모으는 식이다. 또 허리와 무릎 등에 붙어 있는 생체인식센서를 통해 우리 몸의 움직임과 상태에 관한 정보를 수집할 수도 있다.

이 같은 개념은 1945년 미국 과학연구개발사무국 국장이었던 바네바 부시에 의해 처음 제안됐으며 1980년대부터 캐나다와 미국, 일본 등지에서 연구가 본격화되기 시작했다. 2003년엔 미국 고등방위계획국(DARPA)이 군사훈련에 대한 평가와 효율 제고를 위해 도입을 검토하기도 했다. 하지만 사생활 보호에 문제가 있다는 여론의 반대에 부딪혀 무산됐다.

라이프로그 기술이 상용화되면 인간의 생활에도 큰 변화를 가져올 전망이다.

기억나지 않는 부분을 마음대로 꺼내 볼 수 있기 때문에 인간은 소소한 정보까지 놓치지 않아 수많은 오류를 막을 수 있다. 또 실시간 수집되는 생체정보는 건강관리를 획기적으로 개선할 수 있으며 어린이와 노인 등 약자를 보호하는 데도 큰 역할을 할 수 있다. 실제 ETRI에선 지난해 경희의료원과 함께 서울·경기지역 노인 56명을 대상으로 이 기술의 활용도를 시험한 바 있다. 기존 기억력 증진 프로그램에 라이프로그 기술을 접목하는 방식이었는데 참여한 노인들의 기억력이 높아지는 결과를 얻었다는 게 연구진의 설명이다.

배 박사는 “기업들은 이 같은 정보를 광고나 각종 마케팅 활동에 활용하는 등 새로운 개념의 수익모델을 만들 수 있다”며 “내가 필요한 서비스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필요한 서비스가 알아서 제공되는 시대가 열리는 것”이라고 말했다.

■인체의 ‘블랙박스’, 어떻게 구현하나

라이프로그 기술이 실현되려면 정보를 수집하는 ‘지능형 가젯(Gadget)’과 이를 무선으로 전송할 ‘통신망’ 그리고 분류 및 저장을 담당하는 ‘서버’가 필요하다.

지능형 가젯은 사용자의 생활경험을 정보로 수집하는 일종의 입력장치다. 가젯은 저장장치와 전원장치를 기본으로 갖춘 보드에 정보수집장치를 올려놓는 형태로 구현된다. 현재 ETRI에서 개발된 가젯을 예로 들면 가로 4㎝, 세로 5㎝의 보드에 카메라나 GPS, 오디오 등 필요에 따라 각종 센서를 얻는 방식이다.

센서들은 필요에 따라 탈·부착이 가능하며 온도와 조도 등의 정보를 수집한다. 이 장비는 비디오의 경우 2시간가량, 나머지 정보는 하루 이상 얻을 수 있다. ETRI는 이 기술을 이용해 가방, 벨트, 팔찌, 목걸이, 다이어리 등 다섯가지의 가젯을 개발했다.

통신망은 가젯과 가젯, 가젯과 서버 간 정보를 전달하기 위해 필요하다. 먼저 가젯간 정보교환은 사용자의 움직임 등을 인식할 때 필수다. 이를 구현하기 위해 저전력 근거리통신망들이 개발되고 있다. 또 가젯과 서버 간 통신망은 가젯에서 수집된 정보를 서버로 전송하기 위해 필요하다. 무선 랜(LAN), 고속하향패킷접속(HSDPA), 고속상향접속패킷(HSUPA), 와이브로(Wibro) 등이 이를 위한 대안으로 떠오르고 있다.

서버는 사용자의 생활경험정보를 저장·관리하는 장치로 특히 중요하다. 정보의 활용도를 높이기 위해선 정보를 ‘의미’ 단위로 잘 구분해 저장하고 사용자 프로파일도 최적으로 관리해야 하는데 이를 서버가 책임지기 때문이다.
또 사용자가 원하는 정보를 적절하게 꺼내주는 것도 서버의 역할이다. 서버는 저장장치와 정보를 의미 단위로 분류하는 저장모듈, 사용자 프로파일을 관리하는 모듈, 로그 데이터를 검색하는 모듈 등으로 구성된다.


배 박사는 “3년 정도 후면 일부 기술의 상용화가 가능하고 10년 후면 라이프로그 기술이 본격 구현될 전망”이라며 “우리나라는 특히 정보기술(IT) 인프라가 잘 갖춰져 있는 데다 전 세계적으로도 유튜브 같은 관련 서비스가 많이 이뤄지고 있다는 환경을 볼 때 발전 가능성이 크다는 판단”이라고 말했다.

/economist@fnnews.com 이재원기자

fnSurve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