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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클릭] 신뢰받는 규제당국이 부럽다/이구순기자

이구순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09.02.18 18:24

수정 2014.11.07 10:40



최근 유럽의 미디어 융합과 방송통신 규제현황을 둘러보기 위해 프랑스와 영국을 방문한 최시중 방송통신위원장은 출장 마지막날 일정을 정리하는 기자간담회에서 유독 ‘부럽다’는 소회를 여러 번 반복했다.

최 위원장은 “양국에서 만난 사람들은 법과 제도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하지 않더라”며 “법은 지키는 것이고 잘못됐더라도 의회에서 개정할 때까진 기다리는 등 정해진 제도를 지켜나가려는 정신적 가치가 부럽다”고 했다.

KT·KTF 합병 추진 이후 유선통신 필수설비 분리 여부를 놓고 방송통신업계가 벌집을 건드린 모양새다. 합병을 반대하는 SK텔레콤이나 LG 통신3사, 케이블TV 업계는 “필수설비를 분리한 영국처럼 합병회사에 필수설비를 그대로 넘겨줘서는 안 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KT는 “SK브로드밴드나 LG파워콤이 설비를 충분히 갖추고 있으니 KT의 관로나 전주, 가입자망은 필수설비도 아니다”며 맞선다.

논란 중인 양측은 자기 주장에 설득력을 더한다며 말끝마다 글로벌 트렌드란 걸 강조한다.
그러나 프랑스와 영국의 방송통신 규제 당국자들은 “규제의 방법은 나라마다 사정에 따라 선택하는 것일 뿐”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정말 중요한 것은 규제당국이 필수설비의 동등접근 규제를 어떻게 취급할 건지 명확하게 결정하고 규제를 실제로 작동해 시장으로부터 규제에 대한 신뢰를 얻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우리나라에도 필수설비에 대한 규제가 없는 게 아니다. 옛 정보통신부는 2002년에 KT의 가입자망 공동활용(LLU) 제도를 도입했고 2003년부터는 KT의 관로나 전주도 의무제공 설비로 정해 놨다. 이미 7년 전에 KT의 필수설비를 모든 통신사업자들이 동등하게 사용해야 한다는 규제 원칙을 정한 것이다.

그러나 이 규제는 허수아비다. 7년 동안 SK브로드밴드가 KT에 필수설비 접속을 신청했다가 거부당한 비율이 무려 86%나 된다.

이렇다 보니 국내 통신업체 누구도 필수설비 동등접속 규제가 존재한다고 믿지 않는다. KT도 동등접속 규정을 굳이 지켜야 할 제도라고 여기지 않는 눈치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방송통신업계는 KT·KTF가 합병해 거대 통신업체가 탄생했을 때 규제당국이 공정한 경쟁의 룰을 보장해 주리라는 믿음은 애초부터 가질 수 없다고 입을 모은다.
결국 현재 벌어지고 있는 필수설비 분리 논쟁의 진짜 이유는 바로 규제에 대한 불신 때문이나 마찬가지다.

최 위원장은 법과 규정이 정해졌는데 잘 지키지 않고 이러쿵저러쿵 하는 우리 국민을 보며 선진국이 부럽다고 했겠지만 기자는 규제당국이 규정을 만들어 놓고도 집행하지 않아 신뢰를 잃어가는 모습을 보며 영국과 프랑스가 부러웠다.


방송통신위원회가 지금이라도 방송통신 시장의 공정경쟁 룰을 명확히 세우겠다는 규제원칙을 정하고 실질적인 집행의지를 확인시켜주는 ‘신뢰 쌓기’에 나서주기를 바란다.

/cafe9@fn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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