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전국

[이상길의 영화읽기]언어의 정원-사랑, 비처럼 음악처럼

뉴스1

입력 2013.08.31 11:15

수정 2013.08.31 11:15

[이상길의 영화읽기]언어의 정원-사랑, 비처럼 음악처럼


[이상길의 영화읽기]언어의 정원-사랑, 비처럼 음악처럼


[이상길의 영화읽기]언어의 정원-사랑, 비처럼 음악처럼


[이상길의 영화읽기]언어의 정원-사랑, 비처럼 음악처럼


[이상길의 영화읽기]언어의 정원-사랑, 비처럼 음악처럼


비 내리는 6월의 어느 아침. 한 소년과 한 여인이 도쿄 신주쿠 도심정원 정자에 나란히 앉았다. 서로 모르는 사이다. 소년은 그림을 그리고 있다. 구두 디자인이다.

조금 떨어져 앉은 여인 곁에는 맥주와 초콜릿이 함께 있다. 여인은 지금 초콜릿을 안주 삼아 맥주를 마시고 있다.


잠시 뒤 여인은 소년이 그림을 지우다 떨어뜨린 지우개를 주워 주게 되고 그 때를 기다렸다는 듯이 소년은 여인에게 묻는다. “우리 어디서 본 적 없어요?”

여인은 아니라고 말하지만, 그 순간 여인의 눈에 소년의 교복에 달린 학교마크가 들어오게 되고 여인은 “봤을지도”라며 말을 바꾼다.

그리고 그녀는 ‘만엽집(万葉集:일본 고전 시가집)’의 한 구절을 읊으며 자리를 뜬다.

“천둥소리가 저 멀리서 들려오고, 구름이 끼고 비라도 내리지 않을까. 그러면 널 붙잡을 수 있을 텐데.”

이제 막 고등학생이 된 소년이 그날 아침 정원에 있었던 이유는 학교를 지각하더라도 하늘의 향기를 품고 내려오는 비가 좋아 그것을 마음껏 느끼고 싶어서였다. 소년은 사춘기다.

반면 여인이 그날 아침 출근을 않고 정원에 있었던 까닭은 세상이 두려워서였다. 그녀는 상처 입은 여자다.

곧 장마가 시작됐고, 소년과 여인은 이후 비가 내리는 아침이면 우연을 가장해 늘 그 도심정원에서 만난다.

비는 ‘슬픔’이다. 맑은 날에 비해. 하지만 비가 슬픔이라는 걸 알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흘러야 한다.

그래서 사춘기 소년에게 비는 아직 가슴 벅찬 즐거움일 수 있다.

하지만 여인에겐 그렇지 않았다. 어느덧 상처투성이로 살아가게 된 그녀에게 비는 자신이 흘려야 할 눈물을 대신 흘려주는 고마운 존재다.

그렇게 언제부턴가 비는 눈물이 된다.

장마가 짙어진 7월이 되자 소년과 여인은 더욱 자주 만나게 됐고, 어느새 소년은 여인을 조금씩 그리고 있었다.

래 여인이 신을 구두도 만들고 있었다. 밤에 잠자리에 들기 전과 아침에 눈을 뜨는 순간 소년은 언제나 비가 오기를 기도했다. 그것은 여인도 마찬가지였다.

사랑은 스펀지에 잉크가 스며드는 것과 같다. 불가항력이다.

하지만 소년에게 사랑은 신비로움 그 자체지만 여인에게는 두려움이었다.

여인이 소년에게 고백한다. “나 말이야. 언제부턴가 제대로 나아갈 수 없게 됐어.”

소년이 일 때문이냐고 묻자 여인은 “여러 가지로”라고 말하지만 소년은 아직 이해할 수 없다.

그래도 그녀가 맥주를 초콜릿과 함께 먹는 이유는 조금 알 것 같았다.

장마가 끝나고 방학이 시작되면서 한 동안 소년과 여인은 만나지 못하게 됐다. 대신 그들 앞에는 커다란 진실이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이미 그녀의 구두를 만들고 있는 소년에게 그것은 아무 것도 아니었다. 마침내 소년이 여인에게 고백한다.

“천둥소리가 들리지 않고, 비가 내리지 않아도 당신이 붙잡아 준다면 난 여기 머무를 겁니다.”

사랑은 언제나 비처럼 내리고, 음악처럼 흐른다. 내리는 비와 흐르는 음악 속에 당위성 따위는 없다. 그냥 그럴 뿐이다.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언어의 정원>에서 소년 타카오(이리노 미유)와 여인 유키노(하나자오 카나)의 만남과 고백이 그렇다.

마치 비오는 날에 수채화를 그리듯 한계를 벗어난 사랑이지만 비처럼 음악처럼 그저 아름다울 뿐이다.

사랑은 동(動)이라기보다는 정(靜)에 더 가깝다. 동(動)은 짧지만 정(靜)은 길다.
그래서 사랑은 긴 여운이고, 기다림이다.

물에 젖어 희석되더라도 수채화를 포기할 수 없듯, 눈물로 그려진 그림, 그게 바로 사랑 아닐까.

마침내 여인을 위한 구두를 완성한 소년은 멀리 보낸 여인을 그리워하며 말한다.


“나아갈 연습을 한 건 분명 나도 마찬가지였다고 지금은 생각한다. 언젠가 좀 더 멀리 나아갈 수 있게 된다면 만나러 가자.”

8월14일 개봉. 상영시간 46분.

(울산=뉴스1) 이상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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