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전국

[한국사 또다른 시각] (3) 고구려 첫 도읍지는 어디일까?

노정용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0.07.08 18:05

수정 2010.07.08 18:05

■고구려는 처음 어디에 도읍했을까?

주몽(朱蒙)이 태어난 곳은 지금 베이징(北京)의 바로 남쪽인 고안현(固安縣)이다. 이곳은 고리국(?離國)이었다. 고리국은 고대 고신씨(高辛氏·BC 2476년)의 둘째 아들 설(契)이 도읍(都邑)한 먼 훗날 후손이었던 고리국왕이 이어받아 세워진 나라이다.

주몽이 어릴 때 이름은 중해(衆解) 또는 추모(鄒牟)이다. 이와 같은 기록은 양서(梁書) 고구려편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고구려는 그 선조가 동명(東明)으로 본시 북고리국(北?離國) 왕자다.
왕이 출타한 후 왕을 시봉하던 여자가 후에 임신을 했다. 왕이 돌아와 보니 시녀가 임신한 것을 알고 죽이려 했다. 그때 시녀가 말하기를 전날 하늘에 기(氣) 같은 큰 닭알이 내려와 그로 인해 임신했다고 말했다. 왕은 임신한 시녀를 가두었다.

후에 아들을 낳았다. 왕은 돼지우리에 아이를 버렸으나 돼지는 헛구역질을 하면서 죽이지 않았다. 고리국왕이 이 말을 듣고 이 아이는 신이 위하는 것이라 여기고 길렀다. 차츰 장성하면서 활을 잘 쏘는 명사수가 된 것을 왕이 보고 다시 죽이려 했다.

동명은 남쪽으로 달아나 엄체수(淹滯水)에 이르자 건널 수 없었다. 동명은 물을 향해 활을 쏘았다. 그러자 고기와 자라가 물 위에 나타나 무사히 건널 수 있었다. 동명은 부여(夫餘)에 이르러 왕이 되었다. 그후 구려(句驪)의 뿌리로서 별도로 구려(句驪)와 갈라지게 되었다. 이곳은 그 당시 한(漢)나라가 있던 현도군(玄?郡)의 땅이었다. 현도군은 지금 대륙 가운데인 섬서성(陝西省) 서안(西安)지대다. 이와 같은 기록은 많은 정사(正史)에서 부여(夫餘)에서 나왔다 하고 또 다른 정사들은 부여와는 별도의 뿌리라고 적고 있으나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유일하게 양서(梁書)에서는 다음과 같이 확실하게 밝히고 있어 신빙성이 있어 보인다.

동명이 엄체수라는 강을 건너 이른 곳이 졸본천(卒本川)이다. 이곳에 임시 궁전인 걸승골성(紇升骨城)을 짓고 나라 이름을 고구려(高句麗)라 했다고 되어 있다.(삼국사기 고구려 본기 제1편 참고)

그러나 이는 사실과 다르다. 처음부터 고구려가 아니었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구려국(句驪國)이었다.

■고구려의 첫 도읍지는 환도성(丸都城)

동명왕 원년 왕은 비류수(沸流水) 물위에서 채소잎이 떠내려오는 것을 보고 따라 올라가 보니 비류국(沸流國)이었다. 비류국왕 송양(松讓)을 만나 겨룬 후 다음 해인 동명 2년 여름 6월 비류국왕 송양은 항복했다.

4년 가을 7월 성곽과 궁실(宮室)을 새로 지은 것을 보면 걸승골성(紇升骨城)을 환도성(丸都城)으로 이름을 고친 것으로 보인다. 이때부터 구려국(句驪國)을 고구려(高句麗)라 한 것으로 보인다. 건국초기에는 고구려라고 이름 한 것은 어떤 정사에도 보이지 않는다.

동명왕 6년 겨울 10월 왕은 오이(烏伊)와 부분노(扶芬奴)에게 명하여 태백산(太白山·지금의 산서성(山西省) 태원시(太原市) 동남에 있던 행인국(荇人國)을 쳐 취했다. 10년 겨울 11월 왕은 부위염에게 명하여 북옥저국(北沃沮國)을 멸한 뒤 그 땅을 성으로 삼았다.

환도성(丸都城)에서 도읍한 지 19년 4월 왕자 유리(類利)와 어머니가 함께 도망 와 고구려로 돌아오자 왕은 크게 기뻐하고 태자(太子)로 삼았다.


가을 9월 동명왕은 40세 나이로 승하(昇遐)했다. 장사 지낸 곳이 용산(龍山·산동성 역성현(歷城縣))이다.
(삼국사기 본기 제1편)

앞에서 본 바와 같이 고구려는 졸본천(卒本川)에 임시로 걸승골성(紇升骨城)을 지은 후 4년 가을 7월 그 자리에 궁실(宮室)을 새로 짓고 환도성(丸都城)이라 한 것으로 보인다.

/이중재 사단법인 상고사학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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