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전국

[한국사 또다른 시각] (7) 왜 잘못된 역사를 배워야 하는가(1)

노정용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0.07.22 18:33

수정 2010.07.22 18:33

중학교 국사 교과서 7쪽을 보면 고조선(古朝鮮)을 현재 압록강 주변과 요령성 일대로 표시하고 있다.

▲ 삼국사기 고구려 원문 기준
▲ 중학교 국사 교과서

사기(史記) 115권 조선열전(朝鮮列傳)편을 살펴보기로 하자. 조선의 왕만(王滿)은 옛 연(燕)나라 사람이다. 본시 낙랑군(樂浪郡)은 왕험성(王險城)이다. 또한 옛날에 이르기를 조선의 땅이라고 했다. 왕험성은 왕검성(王儉城)으로 요(堯)임금의 집이라고 적고 있다. 삼국유사 고조선 편을 보기로 한다.
단군왕검(壇君王儉)은 나라를 열고 이름을 조선이라 했다고 되어 있다.

우리가 말하는 단군은 바로 요 임금을 말한다. 산해경(山海經) 18권에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조선은 지금 낙랑군이다’라고 되어 있다. 여기서 지금이란 고대 조선이 있었음을 뜻한다. 낙랑군은 섬서성(陝西省) 서경(西京·현 西安) 일대다. 낙랑군이었던 이곳은 한무제(漢武帝) 이전에는 조선의 땅임을 나타내고 있다.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本紀) 제11대 동천왕(東川王) 21년의 기록을 살펴보자. 환도성(丸都城)에 선비들의 난이 일어나 도읍을 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평양성(平壤城)을 쌓고 백성과 사당[廟]을 옮겼다. 평양은 본시 선인(仙人)이 있던 요왕검(堯王儉)의 집이다. 혹은 왕의 도읍인 왕험(王險)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후한서(後漢書) 동이열전(東夷列傳) 구려(句驪)편을 살펴보자. 왕망(王莽) 초 구려 군사를 동원하여 흉노(匈奴)를 치고 명을 내려 엄우(嚴尤)를 추격하다 유인하여 구려의 제후(변방의 왕)를 변방으로 들어오게 하여 죽여 목을 장안(長安)으로 전해왔다. 왕망은 크게 기뻐하며 설하였다. 이름을 고쳐 고구려(高句麗)라 했다고 적고 있다.

▲ 고구려 제11대 동천왕은 재임 21년 왕검성(王儉城)을 평양성(平壤城)이라 하고 쌓았다. 고구려 제24대 양원왕은 평양성을 장안성(長安城)이라 하고 길게 쌓았는데, 본래 6리 즉 2.4㎞였던 것이 지금은 31.5㎞의 길이다.

앞에서 보는 바와 같이 고조선은 서경(지금의 섬서성 서안)임을 잘 나타내고 있다.

당서(唐書)에 따르면 한나라 때 낙랑군은 서경이라 했다. 한무제(BC 140∼135년) 이전에 고조선은 지금의 섬서성 서안 일대가 낙랑군이었다. 이곳이 바로 고조선이었다.

통전(通典)과 책부원귀(冊府元龜)도 같은 기록을 하고 있다. 다시 말해 고조선의 중앙정부는 주로 낙랑군이었다. 한무제 이전 고조선의 강역은 중학교 국사 7쪽에서 보는 바와 같이 현재 평안북도 신의주 지방과 요령성 일대가 아니다.


삼국사기에 있는 원문에서는 고조선의 강역이 서경으로 나타나 있다. 이곳은 전술한 바와 같이 고대 요왕검,즉 요단군(堯壇君)이 살았던 왕험성(王險城)이다.
그러므로 고조선의 강역은 지금의 서안을 기준하여 전 세계를 지배했던 것이다.

/이중재 사단법인 상고사학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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