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사회일반

‘탑골공원’ 노인들, 영하 날씨엔 어디로?

남형도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2.02.20 17:48

수정 2012.02.20 17:48

추위가 절정에 달했던 지난 17일 오전 10시께. 언젠가부터 노인들이 모이는 장소의 상징처럼 되버린 이 곳, 종로 탑골공원에는 노인 너댓명이 손병희 선생의 동상 앞에 앉아 담소를 나누고 있었을 뿐 전체적으로는 횅한 분위기였다. 동장군(冬將軍)의 힘 때문이었을까. 평소 노인들로 북적이던 모습과는 대조적이었다.

‘탑골공원’ 노인들, 영하 날씨엔 어디로?

영하 10도 가까이 내려간 날씨, 탑골공원을 즐겨 찾던 노인들은 대체 어디로 갔을까. 또 몇몇 노인들이 맹추위에도 탑골공원을 찾은 이유는 무엇일까.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의 답을 찾아 종로 일대를 직접 다녀보기로 했다.

■ "갈 곳이 없어요." 노인들로 북적이던 '종로3가'역

탑골공원 인근에 있는 종로3가역. 역사 안에는 추위를 피하러 들어온 노인들이 대거 모여 있었다. 중절모, 잠바 등으로 중무장한 노인들은 돌계단에 스티로폼 등을 깔고 앉아 있거나, TV 주위를 서성였다. 몇몇은 담소를 나누고, 대다수 노인은 그저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추위를 피해 종로3가 역을 찾은 노인들. 담소를 나누거나, 가만히 앉아 있는 것이 일상이다.
추위를 피해 종로3가 역을 찾은 노인들. 담소를 나누거나, 가만히 앉아 있는 것이 일상이다.

하늘색 점퍼를 입은 한 노인 옆에 따라 앉았다. 돌계단의 냉기가 금세 전해져 몸이 떨려왔다. "이 추운 곳에 왜 이렇게 앉아계세요?" 기자가 묻자 잘 안 들렸는지 몇 번을 되묻던 박 모씨(78)는 "갈 곳이 없다."며 힘없이 답했다.

평소엔 근처 종묘공원을 자주 찾는다던 박 씨는 "추워서 역 안으로 들어왔다"고 말했다. 점심은 인근 복지관에서 먹는다며 식권을 보여줬다. 집에 계시지 왜 나오셨냐고 묻자 "집에 있으면 눈치도 보이고, 또 말을 터놓을 친구도 없다"고 토로했다.

기자가 다시 '따뜻한 곳에 들어가계시지 그랬냐'고 묻자 박 씨는 묵묵부답. 근처에 앉아 있던 최 모씨(74)가 "이 곳에 있는게 가장 편하다"며 대신 답했다. 무슨 뜻이냐고 재차 질문하자 "그냥 그렇다"며 말을 아꼈다.

탑골공원으로 향하는 길에 주변의 가게들을 둘러봤다. 패스트푸드점, 당구장, 별다방 등 커피전문점까지. 육안으로 봐도 노인들이 마음 편히 즐길 수 있을만한 장소로 보이진 않았다.

영하의 날씨에도 탑골공원에 앉아있던 이 모(77) 노인은 "살아오면서 익숙해진 옛 것들이 마음이 편한데 너무 많은 것이 사라졌다"면서 "세상이 변한건 알지만.."이라며 말끝을 흐렸다. 이 씨는 다시 텅 빈 탑골공원을 가만히 바라봤다.

■ 옛날 영화와 노랫자락에 '소년','소녀' 마냥..

마부, 마음의 행로, 콰이강의 다리..20~30대가 보기엔 조금은 낯선 영화들을 상영하는 이 곳, 종로구 낙원상가에 위치한 '실버영화관'을 찾았다. 55세 이상 어르신들에겐 표값이 단돈 2천원, 추억 속 풀빵과 즐겨 듣던 LP 음악은 '덤'이다.

다음 상영을 기다리며 앉아 있던 오병철 씨는 "CGV 같은 요즘 영화관은 단조롭고 빨라 익숙치 않다"면서 "옛날 영화를 보며 추억을 떠올리고 또래들도 많은 이 곳이 있어 행복하다"고 전했다.

부인 목영숙 씨도 "노년층이 마음 편히 즐길 수 있는 문화 시설이 있어 좋다"면서 "나이가 들면 웃음이 보약이라는데 웃고 즐길 수 있는 이런 곳들이 많아졌으면 좋겠다"고 강조했다.

실버 문화를 즐기는 노년층들. 옛날 영화를 상영하는 실버영화관(위), 실버 바리스타가 차를 대접하는 삼가연정(아래 왼쪽), 서울노인복지센터(아래 오른쪽).
실버 문화를 즐기는 노년층들. 옛날 영화를 상영하는 실버영화관(위), 실버 바리스타가 차를 대접하는 삼가연정(아래 왼쪽), 서울노인복지센터(아래 오른쪽).

안국역 인근에 위치한 서울노인복지센터에도 활기가 넘쳤다. 각 층 별로 취업 안내센터, 당구·바둑 등 취미 시설, 게이트볼장, 하모니카 등 각종 동아리방이 위치해 있었다.

3층 게시판을 둘러보는 기자의 귀에 '쿵짝쿵짝'하는 옛날 노랫가락이 들려왔다. 어르신 몇몇이 흥이 난듯 춤사위를 펼치자 바라보던 이들의 입가에 웃음이 쏟아졌다.

동아리 게시판을 살펴보던 김 모씨(71)는 "우두커니 앉아 있는게 일상이었는데 다양한 활동을 즐길 수 있는 곳이 있어 좋다"면서 "하루가 무척 짧아졌다"며 다양한 정보를 메모지에 적었다.

실버 바리스타가 직접 차를 만들고 서빙하는 '삼가연정'에서 나오던 한 노인은 "생소한 음악과 알 수 없는 이름들의 커피가 많은 전문점보단 차 한 잔을 마음 편히 즐기는 곳이 좋다"며 자주 찾는 이유를 전했다.

■ 충청도, 문경새재에서 찾아오는 '열악한 현실'

노년층을 위한 단순 복지를 넘어 위 같은 '문화·여가 공간'의 필요성이 대두됐지만 서울 종로 인근 지역에 일부 조성됐을 뿐, 아직은 턱없이 부족한 실정이다.

실버영화관을 찾은 오 씨는 "집이 구로인데 오전 7시부터 서둘러야 겨우 시간에 맞춰 올 수 있다"면서 "서울 전 지역을 통틀어도 노년층이 마음 편히 즐길 수 있는 문화 공간은 거의 없다"고 말했다.

목 씨도 "왕복 3시간이 걸리는데 그래도 이것은 양호한 수준"이라면서 "다른 관객 중에는 문경새재에서 오신 분도 있다"고 전했다. 이어 "다른 지역에도 실버 세대가 즐길 수 있는 문화 시설이 많아졌으면 좋겠다"고 강조했다.

종로3가 역 인근의 한 거리. 수많은 간판 속에서 노인들이 발 디딜만한 곳은 그리 많지 않다.
종로3가 역 인근의 한 거리. 수많은 간판 속에서 노인들이 발 디딜만한 곳은 그리 많지 않다.

서울노인복지센터를 찾은 유 모씨(80)도 "집이 종로라 센터가 가까워서 편하지만 다른 분들은 서울 전 지역, 심지어는 충청도에서 오는 분도 있다"면서 "다른 지역에는 이런 공간이 많이 부족한 것 같다"며 안타까워 했다.


실버영화관 김은주 대표는 "어르신들에게 '집에만 있지 마시고 좀 나와보세요'라고 말하려 해도 사실 할만한 것이 없다"면서 "다방 대신 스타벅스가, 다이얼 전화가 스마트폰으로 대체되는 등 빠른 변화 속에 노인들이 두려워하고 주눅들게 된다"고 설명했다.

김 대표는 "내가 노인이 됐을 때 겪을 세상이 지금과 같다고 생각하면 암담해진다.
우리가 맞게 될 미래의 모습이다"라면서 "젊은층 뿐 아니라 노년층이 즐길 수 있는 문화도 공존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humaned@fnnews.com 남형도 기자

fnSurve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