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종원교수의 뮤지컬,영화에 빠지다] 선셋 대로,잊혀진 스타의 유혹

박지혜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09.11.26 16:52

수정 2009.11.26 16:52

▲ 뮤지컬 ‘선셋대로’의 런던 오리지널 캐스트인 패티 루폰이 주제곡 ‘마치 이별을 말하지 않은 것처럼’을 열창하고 있다.

무비컬이라고 늘 흥행이 되는 것은 아니다. 대중의 시선을 끌기에 용이할지는 몰라도 원작의 유명세가 자칫 날카로운 양날의 칼이 되어 손을 베일 수도 있다.

예를 들자면 뮤지컬로 만들어진 ‘반지의 제왕’이 그렇다. 2006년 캐나다에서 2690만달러, 2007년 영국에서 2500만달러를 쏟아붓는 등 우리 돈으로 총 500억원이 넘는 제작비가 투여됐지만 ‘지루한 반지(Bored of the Rings)’, ‘금이 간 반지(Flawed of the Rings)’ 등 언론과 평단의 조롱 속에 1년 남짓 만에 막을 내리는 흥행 참패를 기록했다. 원작의 스케일을 무대에 구현해내는데 급급한 나머지 무대 만의 재미와 극적인 매력을 창출해 내지 못한 것이 치명적인 단점이 됐다.

비슷한 사례는 얼마 전 막을 내린 브로드웨이 뮤지컬 ‘쉬렉’에서도 재연됐다. 원작 브랜드의 힘만으로 파생상품이 가치를 창출할 것이라 기대하는 것은 사실 무모한 바람이다.

자세한 사정은 조금 다르지만 앤드루 로이드 웨버의 비운의 무비컬 ‘선셋 대로(Sunset Boulevard)’도 흥미로운 사례다. 필름 느와르라고도 불렸던 할리우드의 범죄 드라마 시대의 명감독 빌리 와일더가 1950년 제작한 추억의 명작이 뮤지컬의 원작이다. 흑백 무성영화시대의 대스타였던 여배우가 대형 스크린의 컬러 영화라는 시대적 변화 속에서 이제는 대중들에게서 잊혀진 존재가 됐지만 늘 영화계로 돌아갈 것만을 꿈꾸며 지낸다는 그로테스크한 설정이 감상 포인트이다.

영화가 마니아들 사이에서 큰 인기를 누렸던 배경에는 등장인물들도 큰 몫을 했다. 특히 시선을 끌었던 것은 주인공인 노마 데스몬드 역으로 등장하는 여배우 글로리아 스완슨이었다. 영화제작 당시 53세였던 그는 스스로가 바로 잊혀져가는 왕년의 영화스타였다. 덕분에 영화 속 캐릭터의 대사들은 실제 배우의 개인 경험과 묘한 교차를 이루며 소름 돋는 현실감을 완성해냈다. “내가 영화계로 돌아가는 것은 내가 떠난 것을 용서하지 못하는 수백만명의 사람들을 위한 것”, “변한 건 내가 아니라 형편없어진 영화일 뿐” 등 그의 대사에는 인기를 잃어버린 옛 스타의 비장한 고독이 고스란히 담겨져 마니아들의 입맛을 자극했다. 특히 마지막 장면에서 자신을 떠나려는 극작가 조를 살해한 후 몰려든 기자들의 사진 플래시를 영화 촬영장의 불빛으로 오인한 그녀는 정신착란 속에서 대사들을 내?b게 되는데 두고두고 영화팬들에게 회자될 만큼 강렬한 뒷맛을 남겼다.

1993년 제작된 뮤지컬 ‘선셋 대로’는 영화의 스토리 라인을 그대로 따랐다. 1970년대 초반 앤드루 로이드 웨버는 우연히 영화를 보고 무대에 대한 구상을 시작했으며 10여년에 걸친 판권 협상을 통해 마침내 공연권을 확보하는 등 오랜 세월 정성을 들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뮤지컬은 초기부터 엄청난 규모의 제작비로 화제가 됐다. 영국 아델피 극장에서의 초연은 2년여 공연기간 중 총 1300만달러(약 150억원)에 달할 정도로 초대형이었다. 고액의 제작비가 든 ‘선셋 대로’의 무대는 차라리 한 편의 영화를 방불케 했을 정도로 화려했다. 특히 주목을 받았던 것은 저택의 거실로 쓰인 눕혀진 상자 모양의 거대한 세트였는데 무대 위쪽에서 내려와 자유자재로 들려 올라가는 것은 물론 객석으로 밀려들거나 무대 뒤쪽으로 빠져나가는 전후 이동까지 가능해 감탄을 자아냈다. 덕분에 노마가 황홀경에 빠져 부르는 노래 ‘단 한 번의 시선만으로(with one look)’가 나올 때면 세트가 객석으로 미끄러지듯이 다가감으로써 객석의 청중은 자기 자리에 앉아서 영화의 클로즈업을 바라보는 듯한 착시현상을 경험할 수 있었다. 얼마후 브로드웨이로 무대를 옮겨간 ‘선셋대로’는 글렌 클로즈라는 성격파 배우와의 만남으로 또 한번 세상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가창력이 출중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녀는 특유의 분위기와 이미지로 관객을 압도했으며 결국 토니상 여우주연상을 거머쥐는 성과를 이뤄냈다.

하지만 주판알만 튕겨보자면 이 뮤지컬은 실패작으로 구분된다. 엄청난 화제와 장기공연, 여러 수상기록을 세웠지만 정작 브로드웨이에서는 큰 손실을 기록한 채 쓸쓸히 막을 내리는 비운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문제는 매출에 비해 너무 과다하게 책정된 제작비였다. 공연 막판에는 1주일에 4만달러로 책정됐던 광고 예산이 14만달러가 넘게 초과 집행됐으며 제작자의 주간 로열티도 6만달러에 달할 정도로 상승했다. 주간 경비가 73만달러에 이르렀으니 흥행이 되더라도 수지타산이 맞지 않은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였다. 결국 공룡 뮤지컬 ‘선셋 대로’는 투자액의 80%도 건지지 못한 채 무릎을 꿇고 말았다. 말 그대로 공연을 계속하면 할수록 손해가 날 수밖에 없었던 ‘배보다 배꼽이 더 큰’ 뮤지컬이었던 셈이다.

‘선셋 대로’의 실패는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많다. 특히 원 소스 멀티 유스를 노리는 제작자라면 명심해야 할 원칙이 있다.

문화적 파생상품에서 중요한 것은 화려한 무대 효과나 대규모 제작비, 유명세의 ‘원 소스’같은 것들이 아닌, 탄력적인 ‘멀티 유스’ 전략의 존재 여부-얼마나 원작의 창의력과 아이디어를 성공적으로 재가공해낼 것이며 효율적인 재정운영을 통해 이익을 극대화할 것인가에 따라 성공과 흥행 여부가 결정된다는 명제다. 새해가 되면 인기 드라마 ‘선덕여왕’의 뮤지컬 버전도 무대에 오를 것이라는 소식이다.
‘선셋 대로’의 실패를 타산지석으로 삼는 혜안과 지혜가 함께 하길 바란다.

/순천향대 교수·뮤지컬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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