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전시·공연

[박현주가 만난 아트人] ⑪ ‘이중 그림’으로 블루칩 작가 된 김동유

박현주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0.04.01 17:07

수정 2010.04.01 17:07

▲ 멀리서 보면 마오지만 가까이서 보면 먼로로 뒤덮인 '이중 그림'을 탄생시킨 김동유 작가는 유명인의 얼굴을 이중적 방식으로 담아내 일약 세계적인 작가 반열에 올라섰다. 마오쩌둥, 마오 초상화로 보이는 작품(227×181.8㎝)엔 메릴린 먼로 얼굴 약 1369개가 빼곡히 담겨 공산주의-자본주의 대표 인물이 그려내는 아이러니가 강렬한 빛을 발한다. /사진= 성곡미술관 제공.

'얼굴 속의 얼굴' '이중 그림'으로 유명한 스타작가 김동유(45)는 상업적인 작가로 불리는 것에 날선 자존심을 보였다. 해외미술경매시장에서 깜짝 떠오른 그는 작품보다 작품값에 무게를 두는 시선에 아직도 민감하다.

하지만 그를 거론할 때 고가의 작품값은 떼려야 뗄 수 없다. 2005년 홍콩 크리스티에서 반 고흐 8800만원, 2006년 '메릴린 먼로 vs 마오 주석'이 추정가의 25배인 3억2000만원에 낙찰됐다.

당시 현존 국내 작가로는 해외 경매 최고가 기록이었다. 1년 후 홍경택 작가가 '연필그림'으로 그의 신기록을 깼지만 해외경매시장에서 주목받은 김동유에게 세상과 통하는 또 다른 문이 열렸다. 무명 설움을 탈출하며 스타작가로 등극했고 작품은 품절사태까지 빚는 '귀한 상품'이 됐다. 2009년 세계적 미술사이트 아트프라이스 보고서에 따르면 김동유는 1945년 이후 출생한 세계 현대미술 작가 중 최근 1년간 가장 많이 거래된 작가 100명 중 한국 작가로는 유일하게 55위에 들었다.

워낙 말수가 적다는 주변 사람들의 평처럼 김동유는 진지하고 신중했다. 충청도 사투리가 밴 약간 느린 말투와 순박한 인상으로 '산골 소년' 이라는 별명을 가졌지만 단호했고 아우라 있는 작품 앞에서 힘이 셌다.

―'이중 그림' 어떻게 나왔나.

▲대학시절 국내 화단은 설치미술 영상매체가 유행했었다. 그림은 평면의 한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걸 극복하려고 모두 애쓰던 시기였다. 하지만 난 손맛을 버리지 못했다. 오로지 회화로 영상매체에 버금가는 파워를 보여주려고 노력했고 그래서 2가지 이미지를 한 화면에 구축하는 작업이 시작됐다. 홍익대, 서울대 출신도 아니고 학연이나 스승 때문에 열리는 길은 기대도 못했다. 그래서 혼자 기법적으로 굉장히 연구를 많이 했다. IMF를 겪고 생활적으로 무척 힘들었지만 작업을 놓지 않았다. 계속 붓으로 그리는 것을 고집했다. 지금도 조수 없이 혼자 그린다.

―다른 일은 않고 오로지 그림만 그렸나.

▲대학졸업 후 입시미술학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생계유지를 했다. 다른 일은 할 줄도, 생각도 못했다. 사회적으로 보면 비적응자 같다고나 할까. 주류가 아니었기 때문에 더 참고 견딜수 있었던 것 같다. 어린시절부터 화가가 되고 싶었다.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게 중요하다. 작가 생활은 속된 말로 '똥고집'이 있어야 한다. 고집이 세다고 하지만 이것마저 없으면 흔들릴 수 있다.

―지금은 시장에 그림이 많아 가격이 떨어졌다는 소문이 있다.

▲작가가 시장 시스템까지 알 순 없다. 하지만 호황 때 거래 이후 국내에서 작품 거래는 많지 않았다. 오히려 외국에서 성과가 좋았다. 외국 컬렉터들이 작품을 꾸준히 구입했다. 작품을 팔기 위해 소품은 하지 않았다. 2008년 11월에 독일 뮌헨에서 개인전을 했을 때 일이다. 세계적인 경기불황이 시작된 상황이라 갤러리쪽에서 작품값이 너무 높아 자신 없다며 가격을 내리자고 했다. 하지만 난 반대했다. 작품이 안 팔려도 해외에서 개인전을 하는 것으로 의미를 두겠다고 했다. 결국엔 총 4작품이 판매됐고 화랑도 깜짝 놀랐다. 외국에서 가격이 형성되면 국내 가격이 따라가지 않는가. 작가 입장에선 불황, 호황은 일시적이다. 어렵다고 후퇴하기보다 조금 참으면 된다. 이제까지 그렇게 살아왔다.

―어떤 화가가 되고 싶었나.

▲누굴 좋아한다거나 닮고 싶다거나 그런 건 없었다. 그냥 어릴 적부터 그림 잘 그린다는 소리를 들어 그림만 그렸다. 그런데 초등학교 1, 2학년 때 친구들은 잘 그린다고 하는데 선생님은 칭찬을 안 했다. 크레파스로 시원시원하게 그려야 하는 분위기였는데 난 연필로 세밀하고 소심하게 그리는 스타일이었다. 일찌감치 칭찬받고, 대회 나가서 상 받고 이런 기대감은 없었다. 그래서일까 파인 아트보다는 극장 간판에 더 매력을 느꼈다. 재능이 있지만 주류에 들 수 없다는 생각이 많아서인지 커서 영화 간판이나 그릴까 생각했다.

―초기 작품 중엔 이발소 그림이 있던데.

▲쓰레기 같은 것에서 소재를 찾겠다고 다니다가 쓰레기통에 처박힌 '이발소 그림'을 발견했다. 꽃이 있는 정물화인데 그걸 주워다 그 위에 나비를 그렸다. 이걸 보고 평론가들이 죽어 있는 그림을 다시 살려냈다고 거대하게 해석을 하지만 내 모든 작업의 출발점은 쓰레기에서 시작한다. 내가 그린 이미지들도 광고 전단지에 너무나 많지 않은가. 메릴린 먼로를 그려서 뭐가 나오겠나. 내가 잘 하는 것은 그리는 것이었다. 그래서 끝없이 이미지를 모사했고 내 것을 찾아낸 것이다. 말은 거창하지만 실제는 부유한 집안이 아니니까 돈으로 살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쓰레기통을 뒤지면 얻을 수 있었다. 뭐든 어렵게 생각 안 했다. 먼로가 박힌 김일성 그림도 이데올로기 속에서만 생각한다면 그릴 수 없지 않은가. 하지만 예술은 할 수 있다. 이미지를 다룬다는 측면에서 못할 건 없다고 본다.

―최근작은 풀어지고 해체되는 양상이 보인다. 변화가 있나.

▲뭘 해야 되겠다는 구상은 극히 일부분이다. 앞으로 풀어질지, 뭉개질지는 모른다. 하지만 원래 규칙적이고 짜임새 있는 것을 선호한다. 계란판 작품처럼 규칙적인 배열과 깨진 계란이 붙어 있는 아날로그적 조합된 상황, 이런 감수성이 맞았다. 그림의 규칙에 의한 반복처럼 편집증도 있다. 물건이 반듯하게 제자리에 있어야 하고, 뚜껑이 열리면 제대로 닫아놓아야 하고….

내년엔 해외에서 전시한다. 외국 큰손 컬렉터가 세계 미술관을 순례하며 전시하는 그룹전에 참여하게 됐다. 포스터를 내 작품 붓다로 한다고 들었다. 미술관 전시는 또 다른 미술관에서 기회가 생겨 욕심내고 있다. 내년 5월께엔 국내 갤러리에서 전시도 예정돼 있다.

열정은 재능이다. 그게 쌓이면 능력이 된다고 했던가. 김동유는 놀라운 밀도로 응축된 질긴 근성의 작가다. 그의 브랜드가 된 김일성, 박정희, 마오, 존 F 케네디 얼굴 속에 1300개가 넘는 메릴린 먼로 얼굴로 만들어졌다.

박정희인 줄 알고 다가갔는데 먼로가 슝슝슝 튀어나오며 원래 도상을 해체시키는 신기한 작품이다. 권력과 명성은 모두 다가갈수록 사라지는 무지개와 같다는 허무함이 배어 있다.
붓질의 흔적이 역력한 김동유의 '지독한 그리기'를 볼 수 있는 전시가 서울 신문로 성곡미술관에서 28일까지 열린다.

/hyun@fnnews.com 미술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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