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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人] ‘라오지앙후 최막심’ 연출가 양정웅

최진숙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3.04.29 16:16

수정 2013.04.29 16:16

[문화人] ‘라오지앙후 최막심’ 연출가 양정웅


"확 다른 조합이에요. 그런데 묘하게 맞습니다."

깔끔한 캐주얼 정장 차림의 연출가 양정웅(45·사진). '연극쟁이'치고는 그만큼 반듯한 옷차림의 이도 별로 없다. 그의 작품은 이런 그의 패션스타일과도 통한다. 그의 작품은 시적인 압축, 감각적인 이미지를 자랑해왔다. 셰익스피어, 입센의 원작을 각색한 '한여름밤의 꿈' '페르귄트' 등에서 그 장기가 그대로 나온다. 서양 고전을 직접 각색해 한국적 무대·의상·안무를 뒤섞어 시각적 충격을 안기는 게 그의 주특기였다.


이 연출가가 이번에 손잡은 상대는 정교한 문체와 장엄한 서사, 정통 연극에 강한 배삼식 작가다. 오는 5월 8일부터 6월 2일까지 서울 명동예술극장에서 '라오지앙후 최막심'(라오지앙후는 떠돌이라는 뜻의 중국어)이 이들의 조합으로 올려진다. 지난 26일 오전 서울 대학로 한 카페에서 그를 만났다. "이제 태풍의 눈 속으로 진입했어요. 잠시 이 고요가 끝나면 엄청난 사건이 터질 겁니다. 하하."

작품은 '20세기 문학의 구도자'로 불리는 그리스 대문호 카잔차키스의 1941년작 '그리스인 조르바'의 번안작이다. 원작은 1800년대 말 크레타섬을 배경으로 야성의 사나이 조르바의 거침없는 자유 행각을 담고 있다.

'한국판 조르바'는 1941년 러시아령 연해주 얀코프스크 반도 바닷가 근처 조선인 집단 거주지 앵화촌을 무대로 가져온다. "배 작가는 원작을 이국적인 공간에서 벌어지는 낭만적인 자유인의 이야기로 보지 않았어요. 그보다 정치적, 사회적으로 암울한 현실에 주목했습니다. 이런 상황을 설명해줄 공간으로 식민지시대 연해주가 가장 어울린다고 판단했고요." 양 연출가는 "내가 쓴 작품일 땐 대사를 수시로, 멋대로 바꿨지만 지금은 토씨 하나 고칠 때도 작가와 상의한다"며 "토속적인 모습의 세련된 한국 미학을 맛볼 수 있을 것"이라고도 했다.

이야기는 땀흘려 일하고 배불리 먹으며 열정적으로 사랑하는 최막심(남경읍), 이상에 짓눌린 지식인 김이문(한윤춘), 역경의 세월을 거친 여관집 주인 오르땅스(오미연)가 이끈다. 이들을 에워싼 앵화촌 주민들은 당대의 어지러운 현실과 이기심을 상징하는 군상이다.

현학적이고 철학적인 내용이 많은 데다 주변 사건사고가 빈번하고 관념의 언어로 가득찬 원작의 무대화 작업은 사실 쉽지 않은 법. 작가와 연출가는 이를 위해 1940년대풍 음악을 끌어들였다. 일본인 음악감독 하치(가스가 히로후미)가 그 시대 작곡했던 곡들과 이 연극을 위해 새로 창작한 여러 테마곡이 극 전반에 깔린다. "러시아풍의 민요 최막심 테마곡이 가장 자주 나옵니다. 배우들은 악기를 들고 직접 연주도 하고 노래도 불러요." 그러고 보면 이 작품은 일종의 음악극이다. "연극에서 노래는 성악가 수준이 아니어도 됩니다. 노래를 잘 하기보다 그 상황의 심정을 노래로 부르는 거예요. 토속적인 창법의 구성진 소리를 생각하면 됩니다. 음악은 서사를 압축하는 지적인 표현법이에요. 방대한 이야기에 리듬과 속도감을 부여하는 게 음악입니다."

가장 끌리는 인물은 역시 최막심일 수밖에 없다. 이름 '막심'은 러시아어지만 극중엔 "어머니가 날 낳고 후회막심하다고 해서 지어진 이름"이라는 대사도 있다. "영웅적인 의협심을 가진 돌직구 같은 인물입니다. 이것저것 재보지 않고 본능적으로 돌파하는 날것의 사람, 그대로 나옵니다."

지금 이 시대 최막심의 인물이 가지는 의미를 그는 어디에 두고 있을까. "모든 게 풍요로운 시대에 살고 있지만 마음과 철학은 가난합니다. 무대는 조선 강제 이주민 마을의 낯선 이야기예요. 뜨겁게 살고 사랑하는 모순 투성이 인간 최막심을 통해 삶이 아무리 고단하다 하더라도 작은 희망을 느껴볼 수 있으면 좋겠어요. 삶을 온몸으로 이겨내는 최막심을 보면서 삶은 살아볼 가치가 있다, 그 정도라도 생각해주면 좋겠습니다."

그는 연극배우로 시작해 잠시 영화에 단역으로 얼굴을 비친 적도 있다. 1997년 극단 '여행자'를 창단한 뒤엔 연출에 매진했다. 연출 대상은 무용, 뮤지컬, 오페라 등 전 장르를 망라한다. 국립오페라단 창작오페라 '처용' 등 올해 대형 오페라 연출도 2개나 잡혀 있다. 그는 "무대는 어차피 시각적 이미지와 드라마를 총체적으로 다루는 곳이니 서로 통한다"며 "음악도 뭐든 좋다"고 했다.
"클래식, 월드뮤직, 재즈, 뽕짝 다 좋습니다. 그중 가장 좋은 건 국악이에요. 그냥 피가 그쪽으로 쏠려요. 사실 한국적인 건 무조건 좋습니다.
한국의 흙, 햇살, 자연 다 좋아요. 세계 어딜 가도 여기보다 좋은 곳을 못 봤습니다."

jins@fnnews.com 최진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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