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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진희의 도쿄스토리] 순정만화의 고전을 무대로 옮긴 뮤지컬 ‘유리가면’

최진숙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0.11.09 14:02

수정 2010.11.09 14:02


일본은 ‘만화왕국’답게 만화를 원작으로 한 드라마와 영화가 즐비하다. 하지만 이에 비해 만화를 원작으로 한 뮤지컬은 그렇게 많지는 않다. 아무래도 첨단 디지털 기술을 이용해 화려한 볼거리를 구현하는 것이 가능한 드라마나 영화와 달리 공연은 관객과의 약속된 상황을 무대로 하는 아날로그적 장르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대부분 내용이 방대한 만화를 한 편의 뮤지컬로 완결시키는 것이 거의 불가능한 것도 빼놓을 수 없다.

이 때문에 만화를 원작으로 한 뮤지컬은 원작의 주요 에피소드 위주로 만들어지는 것이 일반적이다. 특히 어린이용 만화는 애니메이션으로도 제작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이를 원작으로 한 뮤지컬은 캐릭터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되기도 한다.

일본 만화가 데즈카 오사무의 ‘불새’ ‘아톰’을 원작으로 한 동명뮤지컬. 그리고 고노미 다케시의 만화 ‘테니스의 왕자’를 원작으로 한 동명 뮤지컬 시리즈, 다카라즈카 ‘베르사이유의 장미’ 오스칼·앙토와네트·앙드레 버전, 캐릭터 상품이 더 유명한 ‘가면 라이더’ 시리즈 등이 대표적이다.

올해 일본에서 만화를 원작으로 한 뮤지컬로는 8월 11∼27일 사이타마예술극장, 9월 2∼15일 오사카 시어터 브라바에서 공연된 ‘유리가면-2명의 헬렌’을 꼽지 않을 수 없다. 원작이 순정만화의 고전으로 꼽히는 ‘유리가면’이라는 것도 무시할 순 없지만 연출가가 니나가와 유키오이기 때문이다. 니나가와는 2년 전인 2008년 8∼9월 원작 만화의 초반부만을 가지고 1편을 만든 바 있다. 당시 주인공을 일반 공모로 뽑아 일본 연극계에서 화제를 불러일으킨 바 있다.

한국에선 한번도 작품이 소개된 적이 없지만 니나가와 유키오는 명실상부한 일본 연극계의 1인자이자 일본 출신 연출가 가운데 세계적으로 가장 많이 알려진 연출가다. 특히 가부키를 연상케 하는 화려한 비주얼의 셰익스피어와 그리스 비극은 정말 유명하다. 그래서 아시아인으로는 처음 1992년 셰익스피어 전문극장인 런던 글로브극장 예술감독으로 위촉되기도 했다. 현재는 사이타마예술극장과 도쿄 분카무라 시어터코쿤 예술감독을 10년 넘게 겸임하고 있다.

한국에도 잘 알려진 만화 ‘유리가면’은 편모 슬하의 평범한 소녀 기타지마 마야가 그녀의 재능을 알아본 여배우 츠기카게 치구사와의 만남을 계기로 배우로서 성장해가는 이야기다. 츠기카게 치구사는 일본 연극계의 환상의 명작 ‘홍천녀’를 연기한 전설적인 배우로 홍천녀를 다시 연기할 수 있는 후계자를 키우는 것만이 삶의 목표다.

츠기카게 외에 배우로서 마야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두 인물이 있다. 한 명은 유명 영화감독과 여배우를 부모로 둔 히메카와 아유미로 필생의 라이벌이다. 재능과 미모를 타고난데다 노력파인 아유미는 마야와 홍천녀를 두고 경쟁하게 된다.

또다른 한 명은 재벌 다이토 그룹의 후계자로 연예기획 및 제작사 사장인 하야미 마스미. 그는 홍천녀의 판권을 가지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하는 냉정한 인물이다. 그러나 마야의 첫 무대를 본 뒤 그녀의 열정과 매력에 반해 그녀를 몰래 돕는다. 특히 마야가 무대에 설 때마다 보라색 장미를 보낸다.

마야는 나중에 보라색 장미를 보내는 후원자가 극단을 무너뜨리고 자신의 엄마를 죽음으로 몰고 간 마스미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하지만 이미 마스미를 사랑하게 된 마야는 괴로워한다. 하지만 츠기카게의 충고를 듣고 마스미에게 사랑을 고백하기로 결심하는데, 마스미는 이미 다른 재벌가 딸과 정략 약혼을 하고 만다. 한편 마야와 아유미는 홍천녀 역을 놓고 츠기카게의 시험을 치르게 되는데…(미완).

1976년부터 연재를 시작한 이 작품은 30년이 넘은 지금도 끝나지 않은 것으로 악명이 높다. 이 때문에 ‘왕가의 문장’ ‘악마의 신부’와 함께 순정만화계의 저주받은 3대 걸작으로 불리기도 한다. 특히 ‘유리가면’의 원작자인 미우치 스즈에는 우주신령을 믿는 신흥종교 ‘오-엔 네트워크’를 만들면서 절필을 선언해 주변을 경악하게 만든 바 있다. 그런데, 2008년 3월부터 ‘우주신령의 계시’로 다시 만화를 그리기 시작했고, 지난 2년 사이에 3권의 단행본을 냈다. 그리고 2년 안에는 작품을 완결지을 예정이라고 한다.

이들 세 작품 가운데 고대 이집트를 배경으로 한 ‘왕가의 문장’과 악마와 인간의 사랑을 그린 ‘악마의 신부’가 다른 장르로 그다지 만들어지지 않았던 것과 달리 ‘유리가면’은 1980년대부터 연극, 뮤지컬, TV 및 라디오 드라마로 꾸준히 만들어졌다.

이번에 니나가와 연출로 무대에 오른 ‘유리가면-2명의 헬렌’은 마스미 때문에 극단을 잃은 마야가 외부 극단의 작품에 출연하며 연기 열정을 불태우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마야의 라이벌인 아유미 역시 언젠가 ‘홍천녀’를 연기하고 싶다는 열망을 가지고 다양한 연기 경험을 쌓는다.

그런데, 마야가 ‘돌의 미소’라는 작품에서 인형 역할로 출연하고 있을 때 어머니가 행방불명 된 소식을 듣게 된다. 마야는 아무런 감정도 표현해서는 안되는 인형 연기 도중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고 만다. 이 때문에 격노한 츠기카게는 마야에게 근신과 함께 마스미가 제작하는 연극 ‘기적의 사람’ 오디션에서 주인공 역할에 합격하지 못하면 파문시키겠다고 말한다.

연극 ‘기적의 사람(Miracle Worker)’은 3중고를 가지고 태어난 헬렌 켈러와 스승 앤 설리반을 다룬 작품으로 1959년 미국에서 초연됐다. 일본에서 특히 인기가 있어서 2∼3년에 한번 꼴로 공연된다.

어쨌든 ‘기적의 사람’의 헬렌 역을 맡기 위해 마야는 보라색 장미의 사람, 즉 마스미가 준비해준 별장에서 역할 만들기에 몰두한다. 그리고 오디션에 참가한 마야는 마유미와 함께 더블 캐스팅된다. 상대역인 설리번을 맡은 배우는 아유미의 엄마인 히메카와 우타코. 그녀는 야성적이고 천부적인 마야의 연기와 치밀하게 계산된 아유미의 연기 사이에서 고민한다. 하지만 공연이 끝난 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마야에게 입맞춤하고, 아유미는 마야에게 졌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리고 마야와 아유미는 ‘홍천녀’를 놓고 새롭게 경쟁할 것을 다짐한다.

뮤지컬 ‘유리가면-2명의 헬렌’은 “연극이 만들어져가는 과정을 관객에게 보여주고 싶다”는 니나가와의 의도를 반영해 공연 전에 일반 관객들이 무대 위에 올라와 배우들이 연기와 신체 트레이닝 하는 것을 보는 것부터 시작한다.

처음에 아무 것도 없던 빈 무대는 서서히 ‘유리가면’의 세계로 바뀌어간다. 그리고 그 수단으로써 니나가와가 이용한 것은 원작 만화가 그려진 거대한 패널이다. 마야, 아유미, 츠기카게 등의 모습을 담은 패널이 서로 오가며 점점 살아있는 각각의 배우들로서 나타난다. 또 마야가 넘어야할 고비를 상징하거나 괴로움 등 감정을 표현할 때도 니나가와는 이 패널을 이용한다.

이외에 이 작품은 공연장의 관객이 극중 관객이 되어 마야가 연기하는 작품을 보고 있는 것처럼 객석을 자주 활용하는 것이 특징이다. 즉 배우들이 단순히 등퇴장하는 통로로서 사용하거나 무대 위의 세트 전환을 위한 시간을 벌기 위해서가 아니라 객석에서도 극중극을 보는 배우들의 연기가 이뤄진다.

한편 언제나 톱스타를 기용하는 니나가와 답게 이 작품에도 뮤지컬계 스타들이 대거 포진했다.

마야 역의 오와다 미호, 마유미 역의 오쿠무라 카에, 츠기카게 역의 나츠키 마리, 우타코 역의 코주 타츠키, 마스미 역의 니이로 신야 등이 안정적인 연기를 펼쳤다. 특히 마야 역의 오와다 미호는 요즘 젊은 배우들 가운데 캐스팅 0순위라는 소문답게 무대 위에서 돋보였다.
다만 워낙 탄탄한 드라마에 눌린 탓인지 뮤지컬 넘버가 배경음악에 머무른 것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lovelytea@par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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