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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n스트리트]그리스를 위한 변명

곽인찬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2.02.15 09:41

수정 2012.02.15 09:41

불타는 그리스를 보고 혀를 차는 이들이 많다. "외환위기 때 한국의 금모으기 정신을 본받으라"는 외신 보도가 나오면 괜히 우쭐해지기도 한다. 인류 문명의 발상지인 그리스가 졸지에 포퓰리즘의 부작용을 실시간으로 보여주는 체험학습장으로 전락했다.

왜 이렇게 됐을까. 복지에 취한 그리스인들은 정말 구제불능인가. 전후 그리스 사회에 밴 사회주의 전통이 이들을 게으른 소로 만든 걸까. 불타는 그리스에서 궁금증을 풀 힌트 하나를 얻었다. 그리스 의회가 2차 구제금융을 받기 위해 긴축안을 통과시킨 지난 13일(현지시간) 시위대는 그리스 중앙은행 간판의 '그리스'를 페인트 칠하고 그 옆에 '베를린'이라고 적었다. 긴축안을 주도한 독일에 강한 반감을 드러낸 것이다.


2차 대전 때 그리스인들은 독일 점령군에 맞서 봉기했다. 끈질긴 저항에 부닥친 독일군은 민간인을 상대로 유혈보복도 서슴지 않았다. 그리스계 유대인들은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끌려가 떼죽음을 당했다. 당시 윈스턴 처칠 영국 총리는 "그리스인들이 영웅처럼 싸우는 게 아니라 영웅이 그리스인들처럼 싸운다"며 그리스 유격대의 분부신 활약에 찬사를 보냈다. 결국 독일은 1944년 10월 그리스에서 도망치듯 빠져나간다.

악연을 잊지 못하는 그리스인들에게 "돈이 없으면 섬이라도 팔아서 빚을 갚으라"는 독일의 '충고'는 치욕이다. 자부심 강한 그리스인들에게 독일은 돈 좀 있다고 뻐기는 악덕 전주(錢主) 같은 존재다. 과거의 적이 나라의 운명을 좌지우지할 판이니 속이 뒤집힐 노릇이다.

만약 외환위기 때 일본이 구제금융을 앞세워 깐깐한 시어머니 노릇을 했다면 어땠을까. 그때도 전주 앞에 직수굿이 머리를 숙인 채 국난 극복에 매진하자며 장롱 속 금을 꺼냈을까. 아니면 네가 뭔데 간섭이냐며 머리를 치받았을까. 숙이든 치받든 기분은 분명 더러웠을게다.

불타는 그리스를 보면 차라리 디폴트(채무불이행)가 더 '깔끔한' 해법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의회에서 긴축안을 통과시켰지만 이제 시작일 따름이다. 최저임금 팍 줄이고 연금 숭덩 덜어낼 때마다 격렬한 저항은 불을 보듯 뻔하다.
여우 피하려다 호랑이 만난다고, 디폴트 피하려다 아예 나라 결딴날까 걱정이다.

paulk@fnnews.com 곽인찬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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