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수첩을 꺼내며] ‘고무줄’ 부동산대책/오승범 건설부동산부 차장

오승범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3.05.05 17:07

수정 2013.05.05 17:07

[취재수첩을 꺼내며] ‘고무줄’ 부동산대책/오승범 건설부동산부 차장

집값이 얼마를 넘어야 고가주택일까. 법률을 찾아보면 국내에서는 지난 1976년 고가주택 기준이 처음 마련됐다. 주택 공급주체들이 소위 집장사에서 번듯한 건설업체로 변신하기 시작한 주택경기 태동기로, 부동산시장과 밀접한 양도소득세 등을 부과하기 위해서였다. 당시에는 5000만원이 넘으면 고가주택이었다. 같은 해 분양된 서울 서초구 반포동 신반포아파트1차 등 강남권에 공급된 주택의 3.3㎡당 분양가격이 30만∼40만원 수준이었으니 상당히 높은 금액이었다. 이후 고가주택 기준은 1억8000만원, 5억원, 6억원 이상으로 점차 높아졌고 2008년 10월에는 잇단 부동산대책에도 거래가 늘지 않자 소득세법과 법인세법 시행령 개정을 통해 6억원에서 9억원으로 상향 조정됐다.

지난달 발표된 4·1부동산대책에서도 당초 취득세, 양도소득세 면제 기준은 9억원 이하였다.
그러나 서울 강남권을 겨냥한 부자감세 논란이 재연되면서 6억원 이하로 하향 조정됐고 이로 인해 6억∼9억원 사이 전용면적 85㎡ 초과 대형 주택들이 세제 혜택 대상에서 제외됐다. 법과 대책을 초월한 정치적 이해관계 덕분(?)이다.

이 결과 서울에서만 10만여가구가 졸지에 4·1대책 사각지대에 놓이게 됐다. 부동산114에 따르면 서울에서 85㎡(이하 전용면적 기준)를 초과하는 9억원 이하 아파트는 총 18만8336가구이고 이 중 6억∼9억원은 9만6911가구로 10만가구에 육박한다. 서울에서만 9억원 이하 대형 아파트 중 51.4%가 세제혜택에서 제외된 것이다. 지역별로는 이른바 부촌인 강남, 서초, 송파 등 강남3구가 2만4015가구로, 서울 세제혜택 소외 가구의 24.7%에 불과하다. 아홉번째로 많은 강남구의 경우 4462가구로 강서구 3751가구 다음으로 많은 정도다.

그럼 집값은 어느 쪽이 더 많이 하락했을까. 집값이 본격적인 하락세로 접어든 2010년 3월부터 4·1대책 발표 전인 올해 3월까지 3년간, 서울에서 85㎡를 넘는 6억∼9억원 아파트는 14.9% 떨어졌고 85㎡(중소형)를 밑도는 6억원 이하 아파트는 6.1% 하락했다. 같은 기간 경기 역시 6억∼9억원의 대형 아파트 하락률(-17.4%)이 6억원 이하 중소형 아파트 하락률(-8.4%)의 두 배를 넘는다. 전국적으로는 6억원 이하 중소형이 2.1% 오른 반면 6억∼9억원 대형은 15.1%나 급락해 사뭇 대조적이다.

시장정상화를 내건 대책이 오히려 집값 하락폭이 더 깊은 6억∼9억원 대형 주택을 외면하고 이전에도 실수요자들에게 인기가 높은 중소형에 힘을 더 실어준 셈이다. 업계에서는 세제혜택에서 소외된 대다수 주택이 50∼60대 베이비부머들이 소유주이고 이 중 상당수가 하우스푸어인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부동산 호황기에는 규제책이, 불황기에는 부양책이 꼬리를 물고 나올 만큼 우리나라처럼 부동산 관련 대책이 쏟아지고 있는 국가는 아마 없을 것이다. 1999년 중산층 서민 주거안정을 골자로 한 8·20대책을 시작으로 지난해 8월 17일 '총부채상환비율 규제보완'까지 1999년 이후 매년 8월 부동산 대책이 나왔을 정도다.
그만큼 정책의 일관성이 중요하다. 하지만 세제수위의 중요 잣대인 고가주택 기준은 법 따로 대책 따로 고무줄이고 4·1대책은 본말이 전도돼 대형 주택거래를 더 어렵게 만들었다.
정치적 판단과 시장논리 사이에서 외줄타기할 수밖에 없는 정치권의 고충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부양책은 적어도 수요가 없는 곳에 수요기반을 확대해야 한다는 기본에 충실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winwin@fn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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