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칼럼 기자수첩

[월드리포트] 미국과 일본의 수상한 밀월

윤재준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13.12.06 17:07

수정 2014.10.31 11:46

[월드리포트] 미국과 일본의 수상한 밀월

동북아 정세가 심상치 않다.

북한에선 김정은을 축으로 한 군부 강경파가 반대파를 숙청하고 전권을 장악했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거의 친정쿠데타 수준인 듯하다.

중국은 방공식별구역 확대로 역내 군사적 긴장을 고조시키고 있다. 미국은 우경화로 치닫는 일본의 입장을 전폭적으로 옹호하면서 가쓰라-태프트 밀약의 악몽을 환기시키고 있다. 1905년 맺은 이 밀약으로 미국이 필리핀을 비롯한 동남아를 지배하는 대신, 일본은 조선과 만주를 강점할 수 있는 명분을 얻게 됐다.


동북아 역학구도는 그동안 불안정 속에서도 균형을 유지해 왔으나 요즘 들어 급변하고 있다. 역내 국가들 간의 사소한 충돌이 자칫 대형 전쟁으로까지 비화될 수 있는 누란의 위기로 치닫는 형국이다. 다툼의 요체는 패권이다. 동북아는 강대국들이 각축을 벌이는 핫스팟(Hot Spot)으로 변해가는 중이다. 한반도는 그 중심에 있다. 각국의 이해가 첨예하게 대립하는 상황에서 정치와 외교 역량이 그 어느 때보다도 강조되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얼마 전 박근혜 대통령과 척 헤이글 미 국방장관의 대화는 적잖은 아쉬움을 남겼다.

뉴욕타임스(NYT)는 지난달 하순 방한한 헤이글 미 국방장관과 박 대통령의 대화내용을 공개했다. 헤이글 장관은 미국의 대아시아 전략에 관해 간략히 설명한 뒤, 한국이 일본과의 관계에 있어 보다 유화적인 태도를 보여 줄 것을 요청했다. 박 대통령은 "독일이 과거 행적에 대해 계속 옳다고만 주장해 왔다면 유럽통합이 가능했겠느냐"며 "그 답은 '노(No)'일 것"이라고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외교가에선 완곡어법을 사용하고 직설적 언어를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박 대통령의 이 같은 대답은 '충격적'이었다고 NYT는 부연했다. 대통령의 답변은 주권국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정당한 의사 표현이었다. 하지만 시기 (時機)가 적절치 않았던 것 같다. 미·중이 충돌하는 미묘한 시점인데다 다자가 참여하는 게임임을 감안한다면, 이는 국익을 극대화할 수 있는 최적의 '미니맥스 (Minimax)'였다고는 보기 어렵다. 확답을 통해 상대를 자극하기보다는 유연하고 우회적인 방법으로 시간을 버는 게 옳았다고 본다.

미국의 불편한 심기는 당장 현실로 나타나고 있다. 의도적으로 일본과 유착하려 하고 있고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협상에서도 한국을 배제하려는 듯한 인상을 풍기고 있다. 일본은 내년 아시아를 순방하는 버락 오바마 대통령을 국빈으로 초청할 것이라고 즉각 화답하고 나섰다. 또 미국의 상징인 존 F 케네디 전 대통령의 딸, 캐롤라인 케네디가 주일 미대사로 부임한 것을 계기로 일본은 대미 동맹관계를 한층 강화하고 차제에 집단자위권의 영역을 확대하겠다는 야심마저 노골화하고 있다. 이런 와중에 몇 달 전 한·중 정상회담까지 갖고 우호와 협력을 다짐했던 중국은 이어도까지 방공식별구역을 확대하면서 그동안 쌓아온 양국 관계가 사상누각이 되는 게 아니냐는 우려를 낳고 있다.

현 시점에서 보면 북방외교를 추구했던 한국으로선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으려다 모두 놓친 모양새다. 대미 관계에 있어 한국은 일본에 주도권을 빼앗겼다. 중·러와의 관계에 있어서도 북한보다 나은 위치에 있다고 단언할 수 없는 처지다. 이쪽 저쪽에서 한국은 2등 국가로 내쳐진 셈이다.

현 국면은 6·25전쟁 직전과 유사하다. 한반도가 미국의 극동방위선인 애치슨라인에서 배제되면서 북한의 침공을 촉발시켰듯이 향후 한·미관계에 알력이 생기면 북한은 군사적 모험을 감행할 개연성이 농후하다.


시간이 갈수록 미·중 간 패권 다툼은 더욱 노골화되고 양국의 마찰과 대립도 심화될 게 자명하다. 그리고 강대국들이 충돌하는 연장선상에서 남북한은 대리전의 희생양이 될 수도 있다.
지금은 속내를 분명히 드러내기보다는 힘을 얻기까지 몸을 낮추고 세월을 기다렸던 흥선대원군이나, 덩샤오핑이 취했던 '도광양회'의 지략이 절실한 때다.

kis@fnnews.com 강일선 로스앤젤레스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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