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n시론]‘할아버지 조항’/이상묵 삼성금융연구소 정책연구실장

홍창기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05.05.04 13:03

수정 2014.11.07 18:39



미국의 법률 용어로 ‘Grandfather Clause’란 말이 있다. 우리말로 직역하자면 ‘할아버지 조항’이다. 의역을 하면 소급적용 배제 내지 기득권 인정 조항이라고 할 수 있다. 법률 냄새가 풍기는 전문용어가 이미 있는데도 굳이 ‘할아버지 조항’이라는 말을 새로 만든 것은 용어의 기본 취지를 더욱 생생하게 인식시키기 위함이다.

법과 제도는 시대 상황의 변화에 따라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 할아버지가 활동했던 시대에는 바람직하게 여기거나 용인하던 행위를 손자 세대에 이르러서는 지양하거나 금지하는 행위로, 그 평가를 달리 할 수 있다.
이러한 사회의 가치평가 변화를 반영해 법과 제도가 변경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문구상으로는 동일한 법과 제도를 두고 할아버지의 세대와 손자 세대가 서로 다르게 해석해 적용하는 일도 있을 수 있다. 이렇게 손자 세대들이 법과 제도를 변경할 때마다 과거의 법과 제도에서 할아버지가 이미 한 행위의 결과를 다시 평가해 재단한다면 어떻게 될까. 세상에 존재하는 법과 제도 중 어느 하나도 믿을 수 없는 상황이 초래될 것이다. 사람들은 자기가 하는 행위의 법적 효과에 대한 불확실성으로 움츠리게 될 것이다. 현존하는 법과 제도의 틀 안에서 본연의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아니라 법과 제도가 어떻게 변할 것인지를 예측하는 데 시간과 노력을 쏟게 될 것이다. 또 본연의 일에서 승패를 판가름짓는 게 아니라 법과 제도를 자기에게 유리한 쪽으로 바꾸는 일에서 승패를 가르려고 할 것이다.

이러한 일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기 때문에 세계 각국의 법률 체계는 과거에 행한 행위로 발생된 권리에 대해서는 행위 후에 제정된 법률 조항을 적용하지 않는 것을 기본 원칙으로 한다. 부득이 공익 목적을 위해 과거에 행한 행위에 대해서도 새로운 법과 제도를 적용하는 경우에도 사익에 대한 피해를 최소화하고 불가피하게 발생하는 사익의 침해에 대해서는 국가가 보상한다. 할아버지 조항은 이러한 일반 원칙만으로 기득권이 보호되는 지가 불분명하거나 기득권이 보호됨을 더 명시적으로 강조하고자 하는 경우에 사용하는 법의 장치다.

그런데 우리는 이러한 정신에 대한 인식이 너무나 부족하다. 법과 제도를 변경하기만 하면 공익을 위해 기득권을 침해하는 것이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인식이 팽배해 있다. 극단으로는 기득권을 원점에서 재검토하는 게 개혁이라고 생각하는 경향마저 있다.

최근의 기업 소유지배구조 논의는 전형적인 예다. 지금의 소유지배구조를 형성한 계열사간 출자가 이뤄지던 개발연대에 오늘날과 같은 논의가 있을 줄 알았다면 어느 기업주가 현재와 같은 소유지배구조가 만들어지도록 방치해 돌팔매를 자초했겠는가. 삼성생명이 보유하는 삼성전자 지분을 관계사 주식이라고 문제삼고 의결권을 제한할 줄 알았다면 반도체 사업이고 뭐고 애초에 출자를 안했거나 주가가 2만원도 안되던 시절에 벌써 지분을 정리했을 것이다. 삼성카드가 보유중인 에버랜드 지분에 대해 소급입법을 통해 처분명령을 내리자는 주장이 제기될 줄 알았다면 진작 다른 방법을 강구했을 것이다. 소유와 지배간의 괴리도라는 개념을 만들어 출자총액제한제도의 졸업 여부를 결정할 줄 알았다면 어느 기업주가 정부의 주식분산 정책에 호응하였겠는가.

지금 우리가 만드는 법과 제도는 우리 스스로가 우리를 구속하는 우리들의 법과 제도다. 앞으로 우리는 이렇게 하자는 우리들간의 약속이다. 할아버지 세대는 당신들간의 약속이 있었고 우리의 손자들은 또 그들간의 약속을 할 것이다. 우리가 우리의 할아버지를 뒤집으면 우리의 손자가 우리를 또 뒤집을 것이다.


개혁은 할아버지나 손자를 향한 것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를 향한 것이어야 한다. 진정한 개혁은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구속하는 약속이어야 한다.
할아버지를 뒤집지 않으면 개혁할 수 없다는 생각은 패배주의의 소산이며 배은망덕이고 옹졸하고 비겁한 책임회피주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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