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춤추러 간다 ⑪
파이낸셜뉴스
2003.05.27 09:34
수정 : 2014.11.07 17:33기사원문
“이 사진 찍던 날이 기억나는구먼. 얄츤 대위와 미세스 황이 예복도, 웨딩드레스도 없이 정말 소박한 결혼식을 올렸던 날이야. 하객은 모두 5명이나 됐을까. 동료 장교 몇명하고 운전병인 나하고, 그리고 미세스 황을 우리 부대 고아원 선생으로 소개시켜준 프랑스 신부가 전부였어. 그래, 맞아. 총소리가 드르륵드르륵 귀를 째는 군용 막사에서 우리끼리 대충대충 결혼식을 올렸던 거야.”
강선우가 미처 끼여들 새가 없다. 악세히르 코잔이 열정적으로 계속해서 토해낸다.
악세히르 코잔이 잠시 숨을 돌린다. 그리고 또 다시 웅철이 놈을 본다. 그가 큰소리로 말한다.
“그래, 얄츤의 코와 눈이 그대로구만. 틀림없이 그 핏줄이야.”
그가 웅철이 놈 머리를 쓰다듬는다. 얼굴도 매만진다. 귀도 매만진다. 살아 생전에 구문호도 마음대로 만지지 못했던 머리고 얼굴이다.
녀석은 생리적으로 누군가 제몸을 쓰다듬는 것을 싫어한다. 그래서 제 아버지의 손길도 늘 거부했던 것이다. 하나 지금은 다르다. 웅철이 놈은 코잔 회장의 손길을 피하지 않고 있다. 잠자코 얼굴도 맡기고 있다.
물론 이를 앙다물고 있을 터다. 하지만 신경질적으로 거부하지 않고 끝까지 지켜내는 녀석의 참을성에 강선우는 새삼 감동할 지경이다. 어쩌면 제 친구인 용식이가 더 걱정어린 표정이다.
왜 이래요!라고 노인의 팔목이라도 잡아 비틀거나, 뿌리치면 어쩌나, 위태위태한 눈빛으로 바라보다가, 휴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다. 그와는 반대로 코잔 회장은 눈물까지 찔끔거리고 있다. 기실 그럴 만도 하다. 얄츤 회장의 아들도 아니고, 손자라니 얼마나 귀엽고 깜찍스러운가.
게다가 축구까지 잘해서, 덕분에 외데미슈 농장팀이 숙원의 우승을 차지하도록 하지 않았던가. 세상에, 얄츤한테 이렇게 건장하고 당당한 손자가 있었다니…. 아마도 그런 기분으로 저처럼 웅철이 놈을 쓰다듬고 어루만졌으리라.
“그래, 이 아이 아버지는 어디 있나?”
코잔 회장이 강선우에게 묻는다.
“죽었습니다.”
“죽었다구?”
“예, 지난 겨울에… 얄츤 회장님께서 항공권까지 사서 보내주셨는데, 비행기도 못타고… 그만 운명하고 말았습니다.”
강선우가 또록또록 말한다.
“그렇다면 얄츤 회장이 이 사실을 알고 있다는 얘기 아닌가?”
“알고 계시구 말구요.”
강선우가 되도록 천천히, 코잔 회장이 단어 하나라도 빼먹지 않도록 차근차근 설명해 마지않는다.
“얄츤 회장 아들인 구문배씨만 죽지 않았어도, 진즉 상봉을 했을 겁니다. 한데, 그만 시기를 놓친데다 일이 잘못 꼬이고 말았습니다. ”
“일이 잘못 꼬이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
“그게 어떻게 된 것이냐 하면….”
강선우는 바라던 바였으므로 서슴없이 얄츤의 아들 세자이 칼렘에 대한 이야기에 열을 올린다. 그의 방해공작 때문에 얄츤과의 해후가 불가능해졌으며, 어쩌면 칼렘이 관계하고 있는 마피아의 조직에 의해 구웅철이 터키에서 비공식 추방될지도 모른다는 우려에 대해서도 시시콜콜 다 까발려 놓는다.
물론 오늘밤 이스탄불을 떠날 수밖에 없는 세브켓 니핫 경우를 들어, 칼렘의 방해가 얼마나 극렬한가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도 빠트리지 않는다.
/백시종 작 박수룡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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