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유의 반도체’ 효성 스판덱스 이야기

파이낸셜뉴스       2007.06.28 16:14   수정 : 2014.11.05 11:46기사원문



만약 여성들의 브래지어 끈이 늘어나지 않는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아마도 여성들의 가슴은 마치 압박붕대로 감아놓은 듯한 큰 불편을 겪어야만 할 것이다.

여성의 가슴을 답답한 속박으로부터 해방시켜 준 고마운 물질은 다름 아닌 스판덱스다.

고무줄에 비해 3배 이상의 강도를 지니면서도 원래길이의 8배까지 늘어나는 신축성을 지닌 스판덱스가 1959년 미국 듀폰사에 의해 개발되면서부터 이같은 여성들의 고민은 자취를 감추게 됐다.

섬유소재 산업에 일대 혁신을 일으키며 시장을 주도했던 나일론도 신축성 부족으로 이런 문제들을 해결하지는 못했다.

섬유업체들은 늘어나는 섬유개발에 매달렸다. 만약 나일론의 질기고 가벼운 성질에 탄성이 합쳐진다면 그야말로 ‘꿈의 소재’가 아닐 수 없었다.

스판덱스가 첫선을 보였을 당시 의류업계는 ‘패션의 산업혁명’으로 받아들였다.

실이 마치 고무처럼 쭉쭉 늘어나면서도 다양한 컬러와 보온기능을 갖춘 스판덱스가 탄생함으로서 마침내 의복이 예술성과 실용성을 함께 갖추게 된 것이다. 이제는 고급 기능성 스포츠 의류와 내의 등에 반드시 들어가는 범용섬유가 됐지만 개발 초기에는 부르는 게 값일 만큼 스판덱스는 고부가 제품이었다.

그래서 스판덱스를 ‘섬유의 반도체’라고 불리운다.

개발초기 패션업체들은 스판덱스를 구하기 위해 선금은 기본이고 듀폰사를 상대로 로비를 벌이기도 했다.

국내에서는 효성이 지난 97년 국내 독자기술로 양산에 성공, 국제무대에서 코리아 위상을 드높이고 있다.

효성은 크레오라(CREORA)라는 독자 브랜드로 글로벌 시장을 상대로 ‘거침없이 하이킥’을 날리고 있다.

이제는 옛 듀폰사인 인비스타의 아성을 넘어 세계 1위를 넘보고 있다.

스판덱스만큼이나 질기로 강했던 제품개발 역사, 효성의 그 뒷 이야기를 담아본다.

"남자가 이런 말하기 뭣한데 눈물이 탁 나더라구요. 그래서 판넬 뒤에서 혼자 울다 나왔죠".

1997년 3월 11일, 방사기에서 스판덱스 실이 뿜어져 나오자 스판덱스 증설과 박원규 차장은 그만 울음을 터트렸다.

현재 스판덱스 건설 담당 이사로 일하고 있는 그는 "실이 끝까지 끊기지 않고 실타래에 감겨야 하는데 이 단계에서 실패를 거듭한 것만 수십번이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대한민국이 세계에서 4번째로 스판덱스 생산기술을 보유한 나라가 된 지난 97년의 쾌거는 끝없는 도전으로 이뤄낸 각고의 산물이다.

■'실패의 연속'-사업 초창기

스판덱스 개발 프로젝트팀이 출범한 것은 지난 90년, 안양의 한 연구소였다. 책임자는 서승원 박사.

서 박사팀이 가장 먼저 한 일은 세계 각국의 스판덱스를 분석하는 것이었다. 실 한 올의 굵기는 머리카락 한 올 굵기인 10마이크론.

이 실 한올은 4가닥이 한 올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바로 여기에 비밀이 있었다.

스판덱스를 구성하는 물질은 PTMG와 MDI라는 화학성분으로 이 두 물질의 합성비율과 조건을 알아내는 게 1차 관문이었다.

문제는 MDI라는 원료 자체가 상온에서 고체가 되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MDI는 상온에서 1000분의 1초의 속도로 반응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PTMG에 섞기만 하면 딱딱하게 굳어버리는 것이다. MDI가 굳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희석용액인 솔벤트를 녹여가면서 합성시켰다.

파일롯 스케일(실험실 수준)에서는 성공이었다. 하지만 이 공법을 대단위 공장에 적용하는 건 또다른 이야기였다.

1992년 4월 22일, 드디어 스판덱스 공장이 완공됐다. 그러나 시운전에 들어가는 순간 솔벤트가 쏟아져 나오며 설비는 엉망이 됐다. 참담한 실패였다.

1993년 12월, 다시 시운전을 했다. 마침내 방사기에서 실이 나오기 시작했다. 성공이었다. 서 박사는 "이제 살았다. 이제 안 잘리겠구나. 도망 안 다녀도 되고…"라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뿐, 방사기에서 나오던 실이 끊어지며 모든 게 다시 수포로 돌아갔다. '사업을 그만 접자'는 의견도 나왔다.

■'불가능은 없다'-시제품 출시

그렇게 실패를 거듭한 지 1년, 드디어 시제품이 나왔다. 하지만 이제는 판로확보가 문제였다. 품질이 검증되지 않은 효성제품을 의류업체들이 선뜻 사용하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뜻밖의 전화가 걸려왔다. 동신섬유라는 중견 섬유업체가 효성 스판덱스 시제품을 테스트해 보자는 것이었다.

당시 스판덱스 시장은 듀폰 등 몇몇 생산업체가 주도권을 쥐고 있었다. 때문에 설사 효성 스판덱스를 구매하고 싶어도 자칫 큰 회사의 심기를 건드릴까 두려워 구매주문을 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시제품 물량은 1kg짜리 600타래. 마치 007작전을 연상케 하듯 시제품들은 나일론 상자에 담겨 테이프로 상자를 가린 채 밤을 이용해 운반됐다.

드디어 테스트가 시작됐다. 우선 원단 공정의 첫 단계인 와핑공정(실을 감는 과정)을 통과해야 한다.

그러나 시작 5분만에 정경기는 멈췄다. 실이 끊어진 것이다. 기계가 다시 작동되었지만 다시 10분도 채 안돼 정경기는 멈추고 말았다.

시제품 테스트가 불발로 끝난 이후 스판덱스 개발팀은 아주 중요한 결함을 발견해 냈다.

원료 혼합비율을 조절하는 유량계의 프로펠러에 이물질이 끼어 있어 오작동을 일으킨다는 사실이다.
효성은 유량계 재설계에 200억원의 투자금을 쏟아붓는 과감한 결단을 내렸다.

진단은 적중했다. 개발 만 3년여만에 스판덱스 실이 끊임없이 뽑아져 나오는 환희의 순간이 눈앞에 펼쳐졌다.

/namu@fnnews.com 홍순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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