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에드윈 랜드시어

파이낸셜뉴스       2007.11.22 16:02   수정 : 2014.11.04 19:14기사원문



■개처럼 사랑하라 솔직하고 단순하게

밤늦게 잠은 안 오고 유선 방송 채널을 돌리다가 재방송하는 드라마를 하나 보았다. 주인공 남녀는 서로 사랑하면서도 둘 다 끊임없이 자존심만을 내세우고 감정을 일일이 계산하느라 언제나 섭섭한 마음만 잔뜩 가슴에 품고 지낸다. 쯧쯧, 사랑만 하기에도 시간이 부족하건만…. 입이 심심하던 차에 문득 선물로 들어왔던 육포와 와인 세트가 생각났다.

육포를 먼저 꺼내놓고 잠깐 와인 잔과 따개를 찾으러 자리를 비운 사이에 육포가 사라져버렸다. 검은 것이 휘익 재빠르게 달아나는 것이 보인다. 이 녀석 루니(개 이름)구나. 육포 한 덩어리를 입에 물고 달아나는 중이었다. 주인이 허락하지 않은 음식은 탐내지 말라고 그토록 가르쳤건만…. 달아나는 것을 보니 혼날 줄 알고서도 본능이 시켜서 저지른 모양이다. “넌, 개도 아니구나. 넌, 쥐새끼지? 음식을 훔쳐 먹는 건 쥐나 하는 짓이야.”

훔친 음식 때문에 개로서의 정체성을 의심받게 된 루니는 이미 물고 있는 육포를 먹지 못하고 바닥에 내려놓은 채 눈치만 슬슬 살핀다. 필자는 신문지 몽둥이로 개의 주둥이를 톡톡 때리면서 반성 좀 하라고 일러주었다. 고기만 보면 사족을 못 쓰는 단순한 녀석.

샤르댕의 그림 ‘뷔페’를 보면 먹을 것들을 앞에 두고 하염없이 쳐다보며 서 있는 개가 있다. 이 개도 틀림없이 우리 개 루니처럼 테이블에 차려진 음식은 절대로 먹지 못하도록 훈련을 받았을 것이다. 그런데 개에게는 지금 커다란 유혹이 펼쳐져 있다. 특히 탐스러운 석화는 테이블 가장자리에 놓여 있어 앞발만 살짝 들어도 닿을 수가 있다. 개는 지금 갈등하며 망설이고 있다. ‘주인님이 먹지 말라고 했는데, 조금만 먹으면 안 될까?’

그림을 잘 들여다보면, 석화 껍질로부터 굴을 떼어낼 수 있도록 칼이 접시 밑에 놓여 있다. 이것은 강력한 금지의 의미처럼 보인다. 칼 뿐 아니라 음식과 잔이 테이블 위에서 매우 불안정하게 배치되어 있다. 왼쪽 가장자리에 보이는 유리잔은 제대로 놓여있지 않아서 곧 떨어져 깨어질 것만 같고, 과일들은 장식을 위해 층층이 쌓여 있는데 잘못 건들면 곧 우르르 쏟아져버릴 것만 같다. 만일 개가 음식을 입으로 물어 가기 위해 테이블에 앞발을 올려놓는다면, 바로 그 순간 칼은 바닥으로 떨어지고 유리잔은 깨어질 것이며, 과일들은 굴러 내릴 것이다.

18세기 계몽주의 시대의 화가인 샤르댕은 우화처럼 교훈이 숨어있는 그림을 주로 그렸다. 정물들이 가지고 있는 숨은 상징성까지 심층적으로 해석하면, 그림의 내용은 단순히 개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인간에게 널리 전하는 훈계가 된다. 이를테면 석화나 과일, 유리잔이나 유리병 같은 것은 서양에서는 전통적으로 여성의 섹슈얼리티와 관련된 상징물로 여겨져 왔다. 시간이 지나면 석화는 금방 맛이 상해 버리고 과일은 벌레 먹히거나 시들며, 유리잔은 쉽게 깨어지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이렇듯 본능적 욕구란 덧없는 것에 불과하고, 인간 세상에는 본능보다 훨씬 더 중요한 많은 것들이 존재한다는 의미다.

개에게는 음식에 대한 본능적 욕구 못지않게 인간과 함께 있고 싶은 욕구가 강하다. 개를 키우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네 발 달린 짐승이 인간을 어쩌면 이렇게 좋아할 수 있을까, 하고 생각해보았을 것이다. 좋아하는 척 하는 것이 아니라 개는 진심으로 인간을 좋아한다. 아무리 못난 인간이라도 개에게는 자기 주인이 가장 멋지고 훌륭한 사람이다.

동물을 주로 그렸던 영국의 화가 랜드시어가 그린 ‘늙은 양치기의 상주’를 보면, 주인이 죽은 후에도 여전히 주인 곁을 떠날 줄 모르고 관 위에 머리를 올려놓은 채 그리워하고 있는 개가 등장한다. 인간에 대한 개의 사랑이 느껴져서 마음이 찡해지는 그림이다.

인간과 개 사이에는 아주 오래된 여러 겹의 인연이 얽혀있는 것 같다. 인간의 아득히 먼 조상인 원시인이 동굴 생활을 하며 주변 맹수들의 위협으로부터 가까스로 스스로를 보호하며 살고 있을 무렵, 늑대 못지않게 무섭게 생긴 네 발 달린 짐승 하나가 인간에게 불현듯 꼬리를 흔들며 다가왔다고 상상해보라. 개는 인간 편이 되어서 다른 네 발 달린 짐승들을 물리쳐주고, 토끼와 꿩도 대신 잡아다가 인간 앞에 물어다 놓았다. 네 발 달린 짐승들 사이에서 개는 인간 편에 선 괴상한 변절자에 이단아였겠지만, 인간에게 개는 한없이 고마운 존재였을 것이다. 인간은 개들이 물어다준 사냥감을 요리해서 개와 함께 나누어 먹었고, 이렇게 해서 인간과 개와의 오랜 동반 관계가 성립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수많은 복잡한 이해관계들을 가지고 있는 인간은 개와 함께 살기 위해 많은 규율을 만들고 개를 훈련시켜야 했다. 식탁위의 음식은 먹지 말 것, 야생 습성을 버릴 것, 아무나 물지 말 것, 아무 곳에서 변보지 말 것, 등등이다. 하지만 개는 인간을 여전히 단순한 방식으로 좋아한다. 개는 하루에도 수십 번 인간에게 반갑다는 인사를 하고 행복하다는 표현을 한다. 꼬리 흔드는 것만으로는 부족한지 온 몸을 흔들면서 뛰어다니고, 너무 좋아서 벌러덩 드러눕기도 한다. 그런 개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실컷 사랑을 표현하지 못하는 인간이 개보다 열등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못난 것도 없는 내가 왜 매달려야 할까, 내 모든 것을 바쳐 사랑할 가치가 있는 사람일까, 내가 이렇게 좋아했는데 나를 떠나버리면 억울해서 어쩌지, 나 혼자 상처받으면 어쩌지….’ 이런 의심 때문에 사람들은 정작 사랑은 않고 후회만 할 뿐이다. 그 때 더 사랑할 걸 하고.

개는 후회하지 않는다.
좋아하고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소통할 줄 아는 현명한 동물이기 때문이다. 또한 사랑은 준 것 만큼 되돌려 받지 않더라도 충분히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을, 인간이 미처 깨닫지 못한 그 사실을 이미 알고 있는 동물이기도 하다. 다른 것은 몰라도 사랑만큼은 개처럼 해야 한다. 사랑하라. 개처럼 솔직하고 단순하게.

/myjoolee@yahoo.co.kr

■사진설명=에드윈 랜드시어, <늙은 양치기의 상주>, 1837, 목판에 유채, 45.8x61㎝, 빅토리아와 알버트 미술관(위쪽 작품). 장 시메옹 샤르댕, <뷔페>, 1728, 캔버스, 194x129㎝, 루브르 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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