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호암의 위대한 유산,삼성
“행하는 자 이루고 가는 자 닿는다. 그동안 내가 일군 모든 사업들은 내 인생에 빛나는 기회를 만들어 주었다. 삼성은 나라의 기업이다. 삼성이 흔들리면 나라가 흔들린다. 나라를 먼저 생각하고 나라에 이로운 방향으로 삼성을 이끌어야 한다.”
올해로 ‘탄생 100주년’을 맞는 호암 이병철 창업주가 생전에 아들 이건희 전 삼성그룹 회장에게 남긴 가슴 벅찬 유훈이다.
‘한국경제의 국부’다운 애국심, 희로애락을 겪은 인간적 고뇌,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 위대한 기업가로서의 사명감 등이 짧은 유훈에 온전히 녹아 있다.
지난 1910년 태어나 1987년 귀천할 때까지 불꽃같은 삶을 살다간 ‘경영의 성인’ 호암. 주목이 살아서 천년, 죽어서 천년을 살 듯이 그가 세상을 떠난 지 20여년이 흘렀어도 ‘한국경제’란 거대한 석재엔 위대한 기업인 ‘이병철’이란 이름 석자가 선명하게 남아 있다.
특히 지난 1938년 ‘삼성상회’를 모체로 한 72년 삼성그룹의 역사엔 호암의 혼과 열정이 담겨 있다. 호암이 있어 삼성이 탄생됐고 삼성이 있어 세계 10위권 한국경제의 성장이 가능했다.
■쌀 300섬으로 191조원 초일류기업 일궈
한국의 경제발전이 그랬듯 기업인 호암의 시작도 미미했다. 그러나 끝은 창대했다. 호암은 쌀 300섬을 밑천으로 삼성상회를 시작했다. 하지만 호암은 작고한 지난 1987년 11월 당시 37개 계열기업, 자산 규모 14조원의 거대기업을 달성했다. 다시 23년이 지난 현재(2008년 기준) 삼성은 자산 규모 318조원(금융 포함), 매출 191조원의 초일류기업으로 성장했다.
그중 호암이 가장 빛나는 경영능력을 발휘한 시기는 1960년대. 1960년대 들어 산업구조가 중후장대사업으로 급속히 발전하면서 거대 기업이 탄생하기 시작했다. 시대흐름을 꿰뚫어 본 호암은 지난 1969년에 삼성전자를 설립하면서 소비재 대체산업에서 자본재 수출산업으로의 전환을 시도했다. 호암은 삼성전자의 성공을 기반으로 1970년대 들어 제일합섬, 호텔신라, 삼성전기, 삼성코닝, 삼성석유화학, 삼성중공업, 삼성항공, 삼성종합건설 등을 설립하면서 삼성그룹의 골격을 잡았다. 특히 1970년에서 1980년의 10년 사이에 삼성그룹의 자산은 연평균 41%, 매출액은 48%, 인력은 50%씩 증가할 정도로 승승장구했다. 지난 1987년 37개의 계열사와 외형 14조원의 국내 최대 재벌그룹으로의 성장을 일군 호암은 그해 11월 19일 한국경제의 역사 속에 영원히 잠들었다.
호암은 항상 새로운 사업에 도전한 ‘한국 최초의 벤처 최고경영자’였다. 호암은 평소에 “사람은 뭐든지 오래하면 긴장이 풀리고 독선에 빠지기 쉽다”면서 새로운 도전을 습관처럼 실천했다.
마치 ‘참치가 거친 파도를 헤치면서 끊임 없이 나아가듯’ 호암은 현재에 안주하지 않았다. 그에게 있어 안주는 패배를 의미했다.
한국전쟁 직후 호암은 제조업 진출의 결단을 내린다. 이미 삼성물산으로 막대한 부를 창출한 호암의 결단은 주위를 놀라게 했다.
호암은 먼저 제당공장을 건설했다. 당시 국내에는 설탕 생산시설이 없어 국민은 국제시장 가격의 3배 가격에 설탕을 구매해야했다. 호암은 1953년 제일제당(현 CJ제일제당)을 설립했다. 호암은 1954년엔 제일모직을 설립하는 승부수를 던졌다.
70세를 ‘종심소욕불유구(從心所慾不踰矩)’라 했던가. 이는 어떤 언동도 궤도를 벗어나지 않는 나이라는 뜻. 70대 호암도 궤도에 벗어남이 없이 도전을 지속했다. 그는 70대에 기흥반도체 공장을 지었다.
당시 반도체사업은 막대한 투자와 첨단 기술이 필요한 난공불락의 사업으로 여겼다. 더욱이 기술발전의 속도가 너무 빨라 사업을 시작해도 수익 창출이 불투명하다는 비관론이 거셌다. 호암은 밤잠을 설쳐가면서 “인력은 어디서 구할까. 자금은 얼마나 투자하나. 공장부지는 어떻게 확보하나”라면서 결단을 내리지 못했다. 호암의 나이 73세 때였다. 백발이 성성한 호암에겐 힘겨운 결단의 순간이었다. 그러나 숙고 끝에 삼성의 반도체 입국선언을 했다.
호암은 투병생활 중에도 도전의지를 꺾지 않았다. 호암은 투병 중에 삼성종합기술원과 삼성경제연구소 건립을 추진하는 최후의 열정을 보였다.
■실패는 도약의 마중물
호암은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은 불굴의 기업가였다. 호암은 실패할 때마다 더욱 높이 도약했다. 호암에게 있어 실패는 곧 ‘성공의 마중물’에 지나지 않았다.
호암은 크게 평생 두 번의 쓴잔을 마셔야 했다. 호암은 이런 사업실패를 통해 “무모한 과욕을 버리고 대세가 기울면 주저없이 물러나야 한다”는 교훈을 얻었다.
호암은 나이 26세에 첫 사업 실패의 쓴 맛을 봤다. 그는 부친으로부터 받은 사업자금 쌀 300섬분의 토지를 받아 도정업과 정미소 등을 운영하기 시작했다. 당시 식산은행으로부터 40만평의 전답을 담보로 융자를 받아 연수 1만섬 200만평의 대지주로 성공하게 된다. 이후 부동산사업에까지 진출했다. 그러나 중·일전쟁이 발목을 잡았다. 일본 정부는 은행의 대출을 중단하면서 호암이 벌인 생애 최초 사업은 실패로 막을 내렸다.
호암이 맛본 또다른 실패는 비료사업에서다. 호암은 삼성이 지난 1966년 소위 사카린 밀수사건에 연루돼 한국비료공장을 국가에 헌납하는 쓰라린 경험을 했다.
사카린 사건의 발단은 창고에 보관 중이던 사카린 원료인 ‘OSTA’라는 약품이 정부의 허가없이 시중에 유출돼 판매되면서 비롯됐다. 10년간의 열정이 수포로 돌아가는 순간이었고 이 사건으로 오랜 시간 외유와 칩거생활에 들어갔지만 그의 열정을 막지 못했다. 실패를 도약판 삼아 호암은 다시 꿋꿋하게 기업가의 길을 갔다.※ 저작권자 ⓒ 파이낸셜뉴스,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