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코디언 거장 심성락,그의 인생엔 악보가 없다
파이낸셜뉴스
2011.06.15 21:09
수정 : 2011.06.15 21:09기사원문
"미쳤어요? 왜 나야. 내가 그만한 자격이 있소? 실패하면 어쩌려고…."
국내선 흔치 않은 헌정 공연이 이달 펼쳐진다. 한국음악발전소가 오는 26일 서울 방이동 올림픽홀에서 올리는 '심성락 헌정공연,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다. 이 무대는 22일 대중음악전문공연장으로 문을 여는 올림픽홀의 개관 페스티벌 기념작이기도 하다. '바람의 노래'는 아코디언의 주름 주머니에서 나오는 자연의 소리를 뜻한다. 한국음악발전소는 "한국 대중가요 발전에 소리없이 기여한 그에 대한 존경과 사랑을 담는 자리가 될 것"이라고 했다. 최백호,주현미, 장사익, 고상지, JK김동욱, 적우 등이 이 무대에 노개런티로 출연한다. 13일 서울 광진구 화양동 건국대 부근 한 커피숍에서 그를 만났다. 깡마른 체격에 중절모를 쓴 그는 "공연 걱정으로 매일밤 잠을 설친다"고 했지만, 목소리는 카랑카랑했다.
■독학으로 한국 가요계 '거장'
가요계에 몸담고 있는 유명 가수치고 그와 일을 해보지 않은 이가 없다. 패티김 이미자 나훈아 심수봉 조용필부터 김건모 유리상자 등 최근 가수까지. 웬만한 가수들의 앨범 재킷 속에 빠지지 않는 반주자 이름 석자가 '심성락'이다. 그의 연주 궤적을 좇아가면 한국 대중가요의 역사가 나온다. '효자동 이발사' '봄날' '인어공주' 등 영화에서도 그의 연주가 배경으로 깔렸다. 그의 멜로디는 쓸쓸하고 애잔하다. 전문가들은 "대중가요의 정서를 표현해내는 데 그만한 연주자는 이제껏 없었다"고 평한다.
정규 음악교육을 단 한 번도 받은 적이 없지만, 독학으로 한국 가요계 '거장'의 자리에 오른 주인공. 이게 어떻게 가능했을까.
"음악을 위해 학교를 다녀야만 하는 건 아니에요. 출세를 하려면 학교를 다녀야죠. 하지만 난 출세를 원하지 않았으니까, 학교 다닐 돈도 없었고…. 살기 위해 음악을 했어요. 생존을 위해 음악이 필요했던 겁니다. 그러면서 음악에 빠졌고 한 20년은 거의 음악에 미쳐 있었죠. 하하."
일본 교토 출생으로 초등학교 때 국내로 들어온 뒤 부산에서 명문 경남중학교를 졸업, 경남고에 진학했지만 2학년 때 학교를 관뒀다. 홀어머니 혼자 힘들게 생계를 꾸리는 형편이어서 집안 살림이 여의치 않았기 때문이다. "월사금이 자꾸 밀려 선생님께 얼굴을 들지 못했어요. 부산 KBS 전속악단에 들어가니 돈이 나오더라구요. 쌀 한되 20원이던 시절이었는데,쌀 한말을 사고 연탄 100장을 들여놓을 정도가 됐죠. 그때 그렇게 좋아하던 어머니 얼굴을 지금도 잊지 못합니다."
그를 여기까지 끌고 온 건 타고난 음감, 그리고 거장들의 공통점이랄 수 있는 집요함이지 않을까. 사실 아코디언을 처음 만진 게 학교를 관두기 직전인 경남고 2학년 때다. 그 무렵 그는 친구 따라 부산 광복동의 레코드 가게를 들르면서 최신 유행가에 빠져든다. 갈 때마다 유행가 가사를 받아쓰느라 정신이 없었다. 레코드 가게의 점원이 그와 동갑이라는 사실을 안 뒤로는 그곳에서 살다시피했다. 어느 날 레코드 가게 주인은 가게 한쪽에다 악기점을 열었다. 아코디언을 만져본 게 그때다. 그런데 웬걸. 어깨에 메고 건반을 두드리는 순간, 저도 모르게 술술 음이 풀렸다. 그전까지 그가 경험한 악기는 초등학교 음악시간 때 만져본 풍금이 유일했다.
부산시내 음악다방은 그에게 '배움의 터전'이었다. 시내 커피숍은 눈감고 다닐 정도로 훤했다. "음악 다방에 종일 앉아 있었어요. 가요, 샹송, 팝 나오는 대로 음을 다 외웠습니다. 처음 듣는 곡이다 싶으면 곧바로 곡명이 뭔지 확인했어요. 파인애플 주스 한잔에다 쪽지를 붙여 곡을 틀어주는 이에게 부탁 메시지를 보냈죠. 그런 식으로 살았던 게 20년인 겁니다. 후배들이 어떻게 하면 나처럼 되냐고 물어요. 그러면 한 20년 미쳐 살아볼래 말해요."
■악보도 없이 수천곡 연주
그렇게 살았으니 동서양 장르를 불문하고 수천곡이 외워졌다. 그는 상대방의 목소리를 들으면 3초 만에 무슨 키가 맞는지도 간파해낸다. 이와 관련, 유명한 일화도 있다. 그는 부산 KBS 악단을 거쳐 군예대 연주자로도 지냈고 1965년 서울로 상경, 그후 작곡가의 길도 걸었다. 1970년대 초반엔 색소폰 연주자 이봉조씨 소개로 김종필 전 총리의 전자오르간 교습선생을 지냈다. 그 무렵 김 총리는 일본 국회의원 40여명을 초청해 자택에서 축하연을 벌이면서 그에게 음악 반주를 맡겼다. 커튼을 치고 자리에 앉은 그는 김 총리의 주문대로 아리랑, 노들강변 등 국악, 민요를 들려줬다. 그러길 30여분. 그는 점점 지루함을 느꼈다. '음악을 한번 바꿔볼까.' 갑자기 마음이 동했다. 1930년대 유행했던 일본 가요를 슬슬 연주했다. 한곡, 두곡, 세곡, 네곡…. 일본 의원들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하나둘 자리서 일어나 그가 있는 쪽으로 걸어온 뒤 커튼을 제치고 비명 같은 소리를 냈다. "이 사람 대체 누구야. 아니, 악보도 없이 연주하잖아."
김 총리의 인연으로 박정희 전 대통령의 노래 반주도 했고 그 인연은 다시 후임 대통령으로까지 이어진다. 그 후로 '대통령의 악사'라는 별명이 붙었다. 그는 박 전 대통령과의 첫 만남을 잊지 못한다. "고복수 선생의 '짝사랑'을 부르시겠다고 하더라구요. 보통 3초 만에 키를 잡는데, 그땐 머리가 복잡해졌어요. 실수하면 안 된다 생각하니 등에서 식은땀이 났죠. 그 순간 'F마이너로 잡어' 이 말이 날아왔어요. 아, 이분 음악을 아시는구나 그러면서 마음이 확 놓였던 기억이 납니다."
1960∼70년대 대중음악 황금기 시절 그는 전성기를 보냈고 3∼4년 전까지도 왕성하게 반주활동을 했지만, 최근 1∼2년은 힘들었다며 긴 한숨을 쉬었다. "옛날처럼 녹음을 안 하잖아요. 저 같은 연주자들이 설 무대가 사라졌어요. 난 음악적 자존심이 있어서 개런티를 확 낮추고 그러지도 못해요. 차라리 연주를 안 하면 안 했지. 지난해부턴 제의가 들어와도 안 했어요. 그러니 자연스럽게 음악을 정리하는 것처럼 됐어요."
최근 음악 풍토에 대해선 거침없이 쓴소리도 했다. "음악다운 음악이 있나 그런 생각을 해요. 깊이가 없잖아요. 연주는 우리가 했는데 무대 위에서 흉내만 내는 이도 버젓이 있고…."
"아코디언이라는 악기가 어떤 점에서 좋았냐"고 묻자 그는 "아코디언은 어느 날 갑자기 내 인생에 들어왔고, 그래서 같이 살아온 것"이라고 답했다. "음악은 살아가는 과정 중 하나"라며 "앞으로는 후배들에게 빚을 갚으며 살고 싶다"는 말도 했다. 그는 이번 공연에서 단독 연주도 선보인다. 후배들의 헌정 무대가 끝나면 가곡 '비목'으로 답가를 선사할 예정. 지난 3월 기부금단체로 지정된 한국음악발전소는 기부문화확산 차원에서 이 공연의 객석 10%를 문화 소외 계층에게 할애한다.
/jins@fnnews.com최진숙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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