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진중공업 부산 영도조선소 파업, 그 이후
파이낸셜뉴스
2012.02.20 17:48
수정 : 2012.02.20 17:48기사원문
【 부산=정상균 기자】 "일감(선박 건조)이 아예 없지요. 지난 1년여간 파업으로 수주도 하지 못했고 약속해 놓은 수주건까지 다 놓쳤으니 지금은 막막하죠."
지난 17일 오후 강추위가 몰아치던 날, 한진중공업 영도조선소에 부는 겨울 바닷바람은 더 매서웠다. 부산 도심에 있는 25만여㎡의 '작은' 조선소는 외딴섬처럼 느껴질 정도로 적막했다.
지난해 11월 9일, 1년여의 파업을 끝내고 노사가 합의(정리해고자 94명 1년 내 재취업, 22개월치 위로금 지급 등)한 지 3개월이 지났다. '희망버스'도 떠났고 파업투쟁을 지원했던 정치인들도 더 이상 찾아오지 않는다고 했다. 파업이 남긴 상처는 고스란히 남은 자들의 몫이 됐다. 최악의 조선경기 앞에서 불어닥친 한진중공업 영도조선소의 현실은 이렇게 냉혹했다.
■일감 없어 절반은 쉬어
영도조선소 생산직 근로자 703명(정규직) 중 432명이 유급휴직 중이다. 잔업수당이 없다 보니 월급은 반토막 났다. 6개월씩 돌아가며 쉬는데 이런 상황이 언제 끝날지 예측하기도 어렵다. 나머지 근로자(271명)는 일부 특수선 건조와 시설보수 등으로 소일하며 하루를 보내고 있다.
선박 용접 불꽃, 블록을 나르는 크레인들, 교대근무를 위해 작업장을 찾는 근로자들은 보이지 않았다. 휑한 바닷바람과 녹슬고 페인트가 벗겨진 설비들뿐이다. '먹튀경영 중단 정리해고 철회'라고 써놓은 시위물들은 생활관(작업자들의 목욕·휴게 공간) 구석에 덩그러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해안 작업장에는 유조선 한 척이 정박, 수리 중이었다. 작업장을 놀리기보다 빌려주고 있는 것이다. 출근한 작업자의 10% 정도가 해양경찰, 해군용 소형 경비정을 건조 중이다. 실제 영도조선소는 지난 2008년 9월 이후 수주건수가 한 건도 없다.
"우리가 배를 만들면 그게 국내 최초였지요. 그만큼 우리나라 조선산업 역사와 같이한 게 이곳 영도조선소인데, 이제는 이렇게 만들 배가 없으니 할 말이 있겠어요. 파업을 하면서 유럽에서 따온 4척의 컨테이너선 건조 의향서(LOI)도 날아가버렸죠."
기자와 동행한 영도조선소 관계자는 한숨을 쉬었다. 1년여간 파업에 따른 기약 없는 휴업의 현실에 체념한 듯 오히려 담담해 보이기까지 했다. 기자가 찾기 전날인 16일, 정리해고 반대를 외치며 타워크레인에 올라 309일 동안 고공시위를 벌였던 김진숙 민주노총 부산지부 지도위원이 선고(징역 1년6개월, 집행유예 3년)를 받은 날이었다.
"1년간의 파업으로 우리는 잃은 게 많지요. 파업에 그렇게 관심을 갖고 매일같이 찾아오던 정치인은 파업이 끝나자 한 번도 찾아오질 않는군요. 이곳을 책임질 사람은 정치인도, 노동운동가도 아닌 바로 한진중공업 식구들입니다."
노조도 둘로 갈라졌다. 지난 1월 11일 새로운 제2 노조가 설립돼 74%(523명)의 조합원이 기존 노조(전국금속노조 한진중공업지회)에서 이탈했다. 회사 생존을 걱정해야 할 판에 기존 노조가 강경책을 꺾지 않으면서 조합원들이 외면한 것이다. 기존 노조는 새로 만들어진 한진중공업 노동조합(제2 노조)과 갈등을 겪고 있다.
■그래도 희망 찾기 안간힘
절망 끝에 희망은 있다. 한진중공업은 범용기술의 저가선은 중국에 빼앗기고 조선업황마저 최악인 상황에서도 영도조선소 생존의 끈을 놓지 않고 있다. 지금 수주계약을 한다 해도 배를 실제 건조하기까지 10개월 넘게 걸리지만 한 건의 수주를 위해 전 세계 곳곳에서 뛰고 있다. '75년의 역사'가 그들의 힘이기 때문이다. 지난 1937년 국내 최초 조선소(옛 조선중공업)로 설립된 한진중공업은 만들었다 하면 '국내 최초' 타이틀을 가질 정도로 경쟁력을 갖고 있다. 국내 최초 국적 쇄빙선인 아라온호(2009년), 국내 최초 석유시추선(1977년), 아시아 최초 액화천연가스(LNG)선(1995년), 독도함 등 국내 최다 군함정 등이 한진중공업 영도조선소의 역작들이다.
물론 선박들이 갈수록 대형화되면서 독의 크기(최대 길이 300m 폭 50m)와 부지가 작은 영도조선소의 입지는 좁아지고 있는 게 사실이다. 하지만 남들이 만들기 어려운 특수선박에 주목한다. 다목적심해특수선박(DSV), 극지탐사용 쇄빙선 등 높은 건조기술이 필요한 고부가가치 선박들이다.
축구장 넓이의 10배가 넘는 세계 최대의 독을 보유한 필리핀 수비크조선소에선 초대형 컨테이너선, 탱커, 벌크선 등을 건조하고 영도조선소에선 중소형 특수선박 위주로 건조하는 이원화전략을 펼친다는 전략이다.
이 회사 정철상 상무는 "한진중공업은 생존을 위해 몸부림치고 있다"며 "파업 사태 이후에 아무도 관심을 갖고 있지 않은 현재의 모습을 제대로 보고 노동계, 정치권 등에서도 반성해야 한다"고 말했다. 상처가 깊어도 새살은 돋는다. 부산 '영도의 봄'이 언제쯤 찾아올지 더 관심을 가져야 할 때다.
skjung@fn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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