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바다가 만든 백색보석 소금
파이낸셜뉴스
2013.06.09 17:29
수정 : 2013.06.09 17:29기사원문
소금은 바다가 만들어낸 최상의 상품이자 인간이 먹는 유일한 암석 미네랄이다. 그래서 그 가치를 두고 '백색의 금'이라고 말하기도 하고 '평양감사보다 소금장수'라는 말이 생길 정도로 예전에 소금은 부와 권력의 상징이었다. 그러니까 소금은 생리적으로 우리 인간에게 필요불가결한 생필품의 하나로 인류가 사용해온 조미료 중에서 가장 역사가 깊다. 소금이 없으면 보존식품을 만들 수 없었고 원정이나 전쟁을 나갈 수도 없었다. 이런 까닭에 소금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오랫동안 주요 교역물품의 하나로 자리했다. 고대 로마는 유럽 각지로부터 소금을 수입하기 위해 도로를 건설했다. 소금 때문에 교역로가 건설되고 국가 간에 동맹이 맺어지는가 하면 미국의 남북전쟁도 결국은 남부의 제염소를 파괴하고 소금을 봉쇄한 데서 북부에 승리를 안기는 계기가 됐다. 이처럼 소금은 인류의 역사.문화.경제 분야 등에 깊숙이 관여하면서 영향을 끼친 물질임에 틀림없다.
염업(鹽業)은 조선시대에 면업, 광업과 더불어 국가 3대 기간산업의 하나였다. 그러나 세월이 흐를수록 세금 징수 대상일 뿐 그 중요성이 경시되면서 낙후를 면치 못했다. 이런 결과는 1876년 개항이 되면서 나타났다. 청나라와 일본은 조선의 소금시장을 두고 치열한 물밑경쟁을 벌이면서 외국산 소금이 봇물 터지듯 쏟아져 들어왔다.
부산은 개항을 전후해 어업이 발달하고 일본인들이 거주하면서 수산제조업 진출이 많아 소금 소비가 많았다. 그리고 수입된 천일염으로 재가공하는 재제염(꽃소금)이 발달했다. 부산 영도는 일제강점기엔 이들 공장의 집산지로 유명했다.
1930년대부터 소금의 수급은 조선총독부에 의해 전적으로 좌우되었다. 광복을 맞고 남북이 분단되면서 중국으로부터 소금 수입이 어려워지자 남한 내에서는 소금 수급 불균형이 나타났다.
그래서 정부는 소금을 전매품으로 묶어놓고 규제했다. 우리나라는 1907년에 처음으로 인천 주안에 천일염전을 만들어 제염업의 일대 혁명을 일으켰다. 이후 서해안 일대에 염전 면적을 늘려가면서 자급자족을 위해 노력해 왔지만 1970년대 소금 전매제도 폐지와 함께 소금 생산은 민영화의 길을 걸으며 점차 설 땅을 잃고 말았다.
부산세관박물관장
roh12340@fnnews.com 노주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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