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야자키 하야오 감독, 5년만의 신작 ‘바람이 분다’
파이낸셜뉴스
2013.07.30 04:10
수정 : 2014.11.04 15:06기사원문
【 도쿄=최진숙 기자】 일본식 단층 아담한 가정집은 지브리 스튜디오 직원들의 아이들이 뛰어노는 어린이 놀이방이었다. 이곳을 지나 두어걸음을 떼면 3m 높이의 물푸레 나무의 뿌리가 아스팔트를 뚫고 땅위로 스멀스멀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집, 일본 애니메이션 거장 미야자키 하야오(72)의 개인 아틀리에 '니바라키'가 나온다. 이 작업실과 인근 곳곳에 배치된 지브리 스튜디오는 도쿄도 고가네이시의 명소다. 지난 27일 이 아틀리에를 찾았다.
미국 할리우드 메이저 영화사 스튜디오의 내부 풍경과 비교하자면, 지브리는 자연을 낀 소박한 전원주택이다. 도쿄도 미타카시의 지브리 미술관처럼 하야오의 세계관이 반영된 결과물일 것이다. "이 미술관은 테마파크가 아닙니다. 하야오 감독의 정신이 담긴 곳입니다." 26일 미술관에서 만났던 나카시마 기요후미 관장의 말이 언뜻 스쳤다.
신작 제목은 폴 발레리의 시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에서 따왔다. 아득한 기억 저편을 자극하는, 애잔함과 경쾌함을 실은 선율이 도입부 스크린 위로 흐르면, 이 시의 문구가 그대로 중앙에 박힌다. 영화는 1920∼30년대 비행기 설계사를 꿈꿨던 실존인물 호리코시 지로의 삶을 다뤘다. 토마스 만과 헤르만 헤세, 슈베르트를 좋아한 순수 청년이자 아름다운 비행기를 만들고 싶어한, 희망을 굳게 믿은 남자가 지로다. 하지만 그는 일본 침략전쟁이 극으로 치닫던 불우한 시대 한복판에서 별다른 의지는 발휘하지 못한, 나약했던 인간이기도 하다. 그의 옆엔 운명처럼 만난 여인 나호코가 있었다. 영화는 지로의 꿈과 사랑, 두 축을 따라간다.
이전까지 자연과 환경, 동심의 세계를 주제로 삼았던 감독의 전작과 비교하면, 정치적으로 민감한 시대 예민한 소재가 분명하다. 지로가 완성시킨 꿈의 비행기 '제로센'은 가미카제 특공대의 무기로 사용되고, 원한 건 아니지만 결과적으로 전쟁의 부역 인물이 됐다는 점에서 사실 논란은 피해갈 수 없다.
체크무늬 셔츠, 흰색 재킷을 걸친 감독은 가지런히 두 손을 모으고 의자에 앉았다. "열심히 살았다고 해서 면죄부를 받을 순 없겠지요. 그건 인정합니다"라고 운을 뗐지만, "그 시대를 산 모든 사람이 그 그림자를 다 업고 갈 수 없지 않겠느냐. 시대가 어디로 흘러가고 있는지 아는 게 더 중요하다"며 찬찬히 말을 시작했다.
감독은 작품에 아버지의 모습까지 들어있다고 고백했다. 중요 사건으로 등장하는 1923년 관동 대지진 때 아버지의 나이는 아홉살. "그 지진으로 3만8000명이 죽었어요. 그전까지 일본은 안정적인 사회였지만 그 순간 모든 게 타버렸습니다. 그 상황은 인생을 다시 생각한 계기가 됐습니다." 감독의 유년시절, 아버지는 백부가 경영하는 비행기 군수공장의 공장장이었다. 그는 하루종일 비행기 근처에서 놀기도 했다. 그는 아버지를 떠올리며 "결과적으로 전쟁에 가담했다고 볼 수 있지만 그래도 좋은 아버지였다. 그 모습이 지로에게도 있다"고 했다.
영화는 광기어린 그 시대까지 미화하진 않는다. 감독은 제국주의 일본의 필연적인 파멸과 저주받은 비행기에 대한 안타까움을 여러 등장인물을 통해 표현해낸다. 하지만 붉은 빛 일장기를 단 비행기의 출전 장면, 이웃나라를 짓밟는 전쟁무기 개발자의 아름다운 이야기에 아시아 관객들이 감수해야 할 불편은 있다. 그는 "히노마루(빨간 원·일장기)를 이렇게 많이 그려본 게 처음이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히노마루는 서서히 다 떨어져 나간다. 관객들이 여러 생각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시대의 아픔을 떼놓고 본다면, 눈부시게 아름답고 가슴 시린 한 편의 동화 같은 영화다. 미야자키 하야오 특유의 섬세한 터치와 히사이시 조의 감미로운 선율이 마음 한구석을 후벼 판다. 영화는 대부분 기계음을 쓰지 않고 사람의 육성으로 부드러운 결을 살려낸다. 심지어 지진 날 때 나온 음향도 사람 목소리였다.
"애니메이션이 비즈니스 수단으로 전락하는 게 안타깝습니다. 나날이 기술혁신이 이뤄지고 있지만, 정밀하다고 다 좋은 것일까요. 실제 영화를 보며 관객들이 듣고 싶어하는 소리는 어떤 걸까, 그걸 생각하면 기술의 진보가 다 좋은 건 아닐 겁니다. " 3차원(3D) 블록버스터 애니메이션의 공습이 아무리 세다 한들, 그는 "지브리엔 3D가 없을 것"이라며 단호했다.
감독은 작정하고 많은 말들을 준비한 듯했지만, 속시원히 자신의 의중을 다 내보이지 못한 것이 아쉬운 듯한 얼굴이었다. 진짜 하고 싶은 말은 따로 있었던 듯한데, 사실 그것이 무엇이었는지 지금도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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