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는 종교가 아니다

파이낸셜뉴스       2013.11.05 16:42   수정 : 2013.11.05 16:42기사원문



"정치는 신학이 아니다."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의 최근 발언이 일부 언론에 실렸다. 정치적 무게가 실리지 않은 전직 대통령이라 그런지 화제가 되지는 않았다. 그래도 우리나 미국이나 정치인에게 꼭 들려주고 싶은 말이다. 비단 정치인뿐이랴. 정치에 관심을 갖고 '우리 편'을 드는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다. 정치를 종교행위처럼 하는 사람들이 정치를 패싸움 판으로 만들기 때문이다.

클린턴 전 대통령의 강연은 미국 지역약사연합회 연례모임에서 있었다. 그는 약사라는 직업을 좋아한다고 말했다. 약사 일이 '실용적'이라는 이유다. 정확한 뉘앙스는 모르겠으되 화술이 뛰어난 그가 자리에 맞는 유머를 구사한 느낌이다. '실용적'인 약사와 '비실용적'인 정치인을 대비해 웃음과 함께 메시지를 전한 것이라 생각된다. 정부 부분폐쇄(셧다운)까지 이른 극단적 정치를 언급하면서 나온 발언인 것을 보면 짐작이 간다.

클린턴 전 대통령은 정치인을 '비실용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가장 점잖은 단어라고 너스레를 떨었다. 그 정도로 최근의 사태는 모두에게 패배만을 안겼다. 예산안을 볼모로 건강보험 개혁안 무산을 시도했던 공화당은 자중지란에 빠졌다. 온건파는 강경파에 휘둘린 지도부를 비난하고 강경파는 온건파를 '짝퉁 보수'로 성토하며 내년 중간선거에서 낙선시킬 것을 벼른다. 공화당에 부정적인 여론조사가 속속 발표되는 것도 분위기를 침울하게 만들고 있다.

반대편의 오바마 대통령은 행복을 만끽할까. 예산안 전투에서 승리, 내년 선거 분위기를 돌려놓은 것은 자축감이다. 그런데 그렇지만도 않아 보인다. 정책 추진 동력이 사실상 소멸됐다는 관측이 지배적이기 때문이다. '담대한 희망'은 오바마 대통령의 상징 구호였다. 이를 실천할 담대한 정책도 많이 준비했다. 총기규제, 이민개혁, 취학 전 아동교육 확대, 최저임금 인상, 기후변화 대응책, 대학학비 부담 완화, 농업개혁과 저소득층 복지 확대 등이 그것이다. 정책 우선순위를 담보할 예산문제도 중요하다.

하지만 한동안 탄력을 받던 총기규제안은 결국 상원의 문턱을 넘지 못했다. 초당적으로 순항하던 이민법안은 하원에서 좌초됐다. 다른 정책들은 의회에서 추진조차 되지 못하고 있다. 정부업무 재개 후 첫 회견에서 오바마 대통령은 이민법안, 농업법안, 예산안의 세 가지를 우선 추진 정책으로 꼽았다. (당파가 아니라)미국을 생각한다면 연말까지 처리할 수 있을 것이라고 호소했지만 현재 분위기로는 비관적이다. 민주당과 공화당, 대통령과 의회, 상원과 하원 사이의 깊은 감정의 골이 쉽게 메워지기 어려워 보인다.

이런 상태는 1차적으로 공화당이 비난받아 마땅하다. '오바마 표'가 붙은 것은 일단 반대하고 본다. 저변에는 '흑인 대통령'이 싫다는 생각도 솔직히 깔려 있다. 문제는 정치의 궁극적 책임이 대통령에게 있다는 사실이다. 오바마 대통령의 미숙한 정치력도 타는 감정에 기름을 붓는 데 한몫하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연초부터 여러 차례 들어온 오바마의 연설 혹은 기자회견에서 공화당 비난은 빠진 적이 없는 단골메뉴다. 의례적으로라도 공화당 의회 지도부를 추어주면서 실리를 취하려는 제스처도 찾기 어렵다. 정부폐쇄 후 가진 기자회견도 마찬가지다. "공화당은 내가 싫은가. 그러면 선거에서 이겨라"는 게 주된 어조였다. 이래서야 타협적 정치환경이 조성될 리 만무하다. 아무런 정책도 추진되지 못한 채 결국 그 손해는 국가와 국민이 입게 된다. 클린턴의 충고처럼 종교화된 정치에서 양측의 접점은 멀어만 보인다.

국민을 의료 사각지대에 방치할 수 없다는 주장은 일리가 있다. 그러나 천문학적인 나라 빚을 줄일 생각은 않고 엄청난 적자가 뻔한 정책을 추진할 수 없다는 생각도 경청할 필요가 있다. 선택의 문제일 뿐 이는 진리와 거짓의 차원이 아니다. 정치인과 국민이 함께 고민해서 절충점을 찾을 수 있다면 더 좋다. 재정적자를 일부 줄여가며 복지 사각지대도 해소할 수 있는 타협안을 내놓는 게 정치 본연의 임무다.

정치적 신념도 좋고, 어떤 정책을 더(덜) 선호하는 것도 좋다. 하지만 정치는 선택의 문제를 다루는 실용적인 행위다. 진리를 찾는 종교가 아닌 것이다. 마치 정통과 이단을 가르는 종교처럼 정치를 하는 곳에서 양보와 타협의 중간지대를 찾을 수는 없다.
"정치는 종교가 아니다." 다시 한 번, 우리나라 정치인들에게도 꼭 들려주고 싶다. 정치의 (광)신도를 자임하는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다.

노동일 경희대 교수·美시러큐스대 방문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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