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2001년 故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 “해봤어?” 정신무장 “해냈다!” 경제기적

      2014.06.24 17:19   수정 : 2014.06.24 17:19기사원문

2000년 이후 대한민국은 큰 변화를 겪어 왔다. 북한의 연평도 포격, 미국발 금융위기, 정보기술(IT) 버블 붕괴, 9·11테러, 가계 부실, 집값 하락, 내수경기 침체, 세월호 참사 등 정치·경제·사회적으로 다사다난(多事多難)했다. 이 시기에 수많은 사람들도 명멸했다. 파이낸셜뉴스는 창간 14주년을 맞이하여 창간 이후 21세기 대한민국을 움직였던 사람들의 어제와 오늘을 14회에 걸쳐 조명해본다.

"나는 성실과 신용을 좌우명으로 삼고 오로지 일하는 보람 하나로 평생을 살았다. 좋은 옷이나 음식, 물건에 한눈 팔 겨를도 없이 그저 일이 좋아 일과 함께 살았다.

타고난 일꾼으로서 열심히 일한 결과가 오늘의 나일 뿐이다. 이 땅에 태어나서 내가 물려줄 유산은 노동에 대한 소박하다면 소박한 내 생각이다. 우리 젊은이들이 앞날을 개척해 가는 데 이러한 내 생각과 지나온 삶이 힘이 되어주길 바란다. 장강후랑추전랑(長江後浪推前浪.장강은 뒷물결이 앞물결을 밀듯 나아간다)이라 하지 않는가. 내 후대는 앞으로 나보다 더 나아질 것이고 또 그래야만 한다. 그것이 내 간절한 희망이다."

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자신이 살아온 이야기를 담담하게 풀어낸 자서전(이 땅에 태어나서·1997년)의 마지막 글이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그의 도전과 열정, 개척정신은 세월이 지날수록 단단해진다. 대한민국 경제사에 실천가로서 그가 그은 획은 크고 깊다. 성장 동력을 잃어가는 오늘의 대한민국에 그의 울림이 목덜미를 내리친다. 2001년 3월 21일 정주영 전 명예회장은 타계했다. 향년 86세. 당시 서울중앙병원(현 서울아산병원)에서 아들인 몽구, 몽헌, 몽준씨가 임종을 지켰다. 장례는 그가 한평생 검소하게 살았던 서울 청운동 자택에서 가족장으로 치렀다. 파란만장한 삶을 뒤로하고 경기도 하남 창우리 양지 바른 곳에 잠들어 있다. 그의 호는 아산(峨山)이다.


■아산이 남긴 가치

가난한 농가의 아들로 태어나 맨손으로 기업을 일으켜 세우기까지 수많은 도전과 시련이 그의 삶이었다. 구자경 LG그룹 명예회장은 대한민국 경제의 기틀을 놓은 아산의 삶을 두고 "스스로 땅을 찾아 말뚝을 박은 사람"이라고 했다.

아산의 기업가정신은 산업보국(産業報國)으로 요약된다. 세계 조선사에 한국인의 기상을 심어준 울산조선소(현대중공업) 건설, 죽을 고비를 숱하게 넘긴 중동 대역사(大役事), 서해안 지도를 바꾼 서산 간척사업 등은 그가 이뤄낸 역작들이다. 불가능할 것이라 여겼던 88서울올림픽도 그가 유치위원장을 맡아 1981년 '바덴바덴의 기적'을 이뤄냈다.

아산은 "이 나라 경제가 지극히 어려워서 내일 부도가 날까, 모레 부도가 날까 할 때, 우리는 중동의 미개척 지역에 나갔다. 하나로 뭉쳐 사력을 다해 달러를 벌어들였다. 이 나라의 어려운 외채문제를 해결하는 데 일조를 했다"고 했다. 통일을 바라며 마지막 열정을 쏟은 대북사업은 미완으로 남아 있다. 1998년 6월 16일 소 500마리를 싣고 군사분계선을 넘은 '소떼 방북'은 남북 민간교류의 물꼬를 텄다. 그의 나이 83세였다. 3개월 뒤에 금강산을 오가는 현대 금강호가 출항했다. 하지만 정권 교체 이후 남북 긴장관계가 고조되면서 6년째 멈춰서 있다.

아산은 한평생 검소한 삶을 살았다. 아산은 인왕산 아래 지은 청운동 새집에 들면서 "옛날 쌀가게 시절 남의 집의 좁은 방에서 엉덩이와 무릎이 구멍 난 옷을 누벼 입고 살던 시절을 생각하면 이 얼마나 큰 호사인가"라고 했다. 청운동 집에 있는 '금성(GoldStar)' 상표의 20년 된 낡은 TV와 닳고 닳은 책장 등 소박한 살림살이는 그를 닮았다. 구두 밑창은 몇 번을 고쳐서 신고, 와이셔츠는 깃, 소매 등을 기워서 입었다. 아산의 집에 든 도둑이 도리어 부인에게 화를 내고 돌아갔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현대가의 변화

아산이 타계한 지 13년이 지났다. 거인(巨人)은 쓰러졌지만, 그가 이뤄낸 가치는 단단한 뿌리가 되었다. 아산은 1946년 4월 수차례 실패를 딛고 서울 중구 초동에 '현대자동차공업사'라는 간판을 내걸었다. 그것이 '현대'라는 상호의 시작이었다. 이후 현대는 건설, 자동차, 조선, 석유화학 등 중후장대(重厚長大) 산업에 뛰어들어 그룹을 일으켰다. 아들들이 장성하자, 아산은 1992년 정치판에 뛰어들었다. 그해 12월 대통령 선거에서 낙마했다. 김영삼 정부가 들어서면서 현대그룹은 시련을 맞았다.

2000년 3월, 이른바 '왕자의 난'을 겪으며 형제들은 반목했다. 정몽구, 몽헌 회장은 경영권 다툼을 벌였다. 그러는 사이 모기업과 다름없는 현대건설은 유동성위기를 맞았다. 아산이 타계하고, 더 큰 아픔이 찾아왔다. 2003년 8월 4일 이른 아침, 대북송금 사건으로 검찰 조사를 받던 정몽헌 회장이 돌연 타계했다.

현대가(家)는 비극을 이겨냈다. 범(汎)현대의 이름으로 현대자동차그룹, 현대중공업그룹, 현대그룹은 각자의 길에서 본격적인 2세 경영을 꽃피웠다. 현대차그룹은 10여년 만에 글로벌 5대 자동차회사로 성장했다. 중국, 브라질, 인도, 미국 등에 자동차 생산기지를 구축했다. 부친의 숙원이었던 종합제철소의 꿈도 이뤘다. 지난해 충남 당진에 쇳물을 생산하는 제철소를 완공, 자동차사업과 함께 성장의 기틀을 갖췄다. 우여곡절 끝에 잃어버렸던 현대건설도 다시 품에 안았다. 1972년 3월, 울산 앞바다 모래사장에서 기적을 일궈냈던 현대중공업은 현재 세계 1위의 조선사로 성장했다. 울산 조선소 착공 40년 만인 2012년, 선박 인도 1억t(1805척) 돌파라는 대기록을 세계 최초로 이뤘다. 아산이 세웠던 정유사업(현대오일뱅크)도 되찾았다.

현대그룹은 정몽헌 회장의 갑작스러운 타계 이후 사세가 위축됐다. 해운사업(현대상선)이 장기침체를 겪고 대북사업은 멈춰 섰다. 현대증권, 현대상선 액화천연가스(LNG) 운송사업 매각 등 생존을 위한 구조조정이 진행 중이다. 창업주의 뜻이 담긴 대북사업에 대한 현대그룹의 의지는 변함이 없다.

skjung@fnnews.com 정상균 기자



■故 정주영 명예회장의 삶

고 정주영 명예회장의 삶은 한국 경제사와 맥을 같이한다. 그의 삶은 파란만장했다.

정주영은 1915년 강원 통천군 아산리에서 가난한 농군의 6남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정주영은 생계를 위해 농사일을 도와야 했다. 일제의 수탈이 극에 달하면서 죽으로 끼니를 때워야 하는 일이 다반사였다. 늘 배가 고팠다. 이곳에선 꿈이 없다는 생각에 무작정 가출을 시도했다. 원산으로, 서울로 두 차례 집을 나갔지만 아버지에게 붙들려 돌아와야 했다. 정주영은 세 번째 가출에 성공한다. 소 판 돈 70원을 손에 쥐고서였다. 인천에서 막일꾼으로 품을 팔던 그는 복흥상회라는 쌀가게에 점원으로 취직했다. 그는 성실하게 일했다. 쌀가게 주인의 신뢰를 얻으면서 그 가게를 인수한다. 그의 첫 홀로서기였다. 1938년 쌀가게 이름을 경일상회로 바꿨다. 고등학교 기숙사에 쌀을 대면서 돈을 벌었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조선총독부의 쌀 배급제로 가게는 문을 닫았다.

이때 서울 최대의 경성서비스공장 직공이던 이을학씨를 만난 게 전기가 됐다. 정주영은 1940년 현대자동차의 모태라고 할 수 있는 자동차 정비업체인 아도서비스공장을 설립했다. 하지만 1943년 일본이 강제 합병시키는 바람에 문을 닫게 됐다.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1946년 서울 초동에 현대자동차공업사 간판을 걸고 자동차 수리공장을 다시 시작했다. 이듬해인 1947년 건설업체인 현대토건사를 세워 3년 후 현대자동차공업사와 합병했다. 현대그룹의 모체가 된 현대건설의 탄생이었다. 6·25전쟁 때 미군 숙소를 짓는 일로 큰돈을 벌었다. 전쟁이 끝난 뒤 한강 인도교 복구 공사 등을 수주하면서 비약적인 발전을 이뤄낸다. 정주영은 1965년 태국 나라티왓고속도로 공사를 따내며 해외 건설시장에 진출했다. 국내 처음이었다. 이 경험을 바탕으로 1968년 경부고속도로 건설도 주도했다. 2년5개월이라는 세계 최단시간 완공 기록을 세운다. 1976년 20세기 최대 건설사업으로 불린 사우디아라비아 주베일 산업항 공사를 따내며 중동 대역사의 꽃을 피운다.

이에 앞서 1966년 현대자동차를 설립한 정주영은 1975년 최초의 국산차 모델인 '포니'를 만들어 수출을 시작했다. 1986년 국내 처음으로 자동차의 본고장인 미국시장에 '엑셀'을 수출, 대성공을 이뤘다.

1972년 정주영은 울산 미포만의 백사장 사진을 들고, 거북선 그림이 있는 500원권을 내밀며 유럽에서 26만t급 대형 유조선 2척을 수주했다. 현대중공업의 출발이었다.
조선소도 없이 배를 수주한 그의 뚝심은 세계 조선사에서도 전무후무한 신화로 남아있다. kim091@fnnews.com 김영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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