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70주년의 씁쓸한 자화상

파이낸셜뉴스       2015.08.13 17:05   수정 : 2015.08.13 18:23기사원문



산모퉁이를 돌아 논가 외딴 우물을 홀로 찾아가선 가만히 들여다봅니다./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습니다./그리고 한 사나이가 있습니다./어쩐지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중략)/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그리워집니다./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고 추억처럼 사나이가 있습니다.

윤동주의 자화상이다. 우물 속 세상은 밝고 평화롭다. 하지만 시인의 내면은 어둠으로 채색되어 있다. 자기성찰을 통해 비극적 현실을 극복하고자 하는 의지적 행위가 내재되어 있다. 어두운 한 시대를 한 점 부끄럼 없이 살아가기를 소망하는 시인의 윤리의식이 깔려 있다. 국치의 울분을 달래며 식민지 지식 청년으로 무기력하게 살아갈 수밖에 없는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시를 쓴 것 같다.

광복 70주년을 맞은 대한민국의 자화상은 어떨까. 6·25전쟁 후 평균 67달러(약 7만8000원)에 불과하던 1인당 국민총소득(GNI)은 420배나 증가했다. 명목 국내총생산(GDP)은 477억원(1953년)에서 1485조원으로 3만1000배 이상 늘었다. 도로를 달리는 자동차 수도 무려 1만5750배 급증했다. 그야말로 상전벽해다. 최빈국에서 선진국 진입 단계에 이르는 천지개벽의 역사를 쓴 것이다.

빛이 있으면 그늘도 있다. 공교롭게도 모두 권력의 핵심에 드리워졌다. 그리고 우리가 선택한 인물들이 만들어냈다. 수치가 아닌 언어(유행어)로 그들의 그림자를 들여다봤다. 언어는 시대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를 외치며 탄생한 이승만 정권 시절은 잇따른 부정선거로 '사사오입' '막걸리 선거' 등 타락정치의 풍자어가 양산됐다.

4.19와 5.16이 일어난 1960년대에는 도탄에 빠진 국민의 심정을 대변한 '못살겠다, 갈아보자'가 유행했다. 박정희 정권 시절에는 '조국 근대화'와 '재건'이 대세였다. 정인숙 사건이 터지자 '세상에 믿을 놈 없다'는 의미를 담은 '오빠조심'이 민초 사이에 널리 퍼져 나갔다. 전두환 대통령이 취임한 이후엔 언론통제 속에 '유비통신' '카더라통신'이 범람했다. 장영자.이철희의 금융부정 사건은 '큰손'이라는 유행어를 남겼다.

김영삼 대통령 때는 차남 현철씨의 국정개입을 지칭하는 '소통령'이라는 말이 회자됐다. 김대중정부 때는 외환위기를 그대로 반영하는 유행어가 속출했다. 정리해고를 당하지 않기 위해 낙지처럼 책상에 매달려 일만 하게 된 현실을 빗댄 '낙지부동'이 대표적이다. 노무현정부 때는 '이태백'이라는 말이 최고 유행어가 될 정도로 청년실업 문제가 심각했다. 이명박정부는 '고소영(고려대, 소망교회, 영남 출신)' '강부자(강남 땅부자)' 등 사적 인연을 앞세운 끼리끼리 인사를 풍자하는 유행어를 낳게 했다. 박근혜정부는 '신비주의' '태평성대(成大)'라는 신조어를 등장시켰다.

그럼에도 그들은 아무 잘못이 없다고 아우성댄다. 자기 기만의 옷을 걸친 듯 다들 너무도 당당하고 떳떳하다. 광복 70주년은 일제강점기에 짧게 살다간 윤동주가 서거한 지 70년이 되는 해다.
시인은 자화상에서 외친다. 자기 밖을 향한 '지적질'은 멈추고 자기 안의 부끄러움을 직시해야 한다고. 맹자도 "행해도 얻지 못하거든 자기 자신에게서 잘못의 원인을 구하라(行有不得者皆反求諸己)"고 했다. 광복 70주년을 맞아 되돌아보는 우리의 자화상은 아직도 부끄럽기 그지없다.

sejkim@fnnews 김승중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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