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폰티악 전쟁.. 英 식민정책에 반기 든 인디언들
파이낸셜뉴스
2015.12.10 17:35
수정 : 2015.12.10 22:22기사원문
부족 연합으로 저항 가능성 확인
英-佛 북미 쟁탈전서 영국 승리
지나치게 고압적 자세로 인해 인디언들 대대적 봉기 일으켜
정전협정 체결로 전투 끝나.. ..'1763년 선언' 영토 인정받아
독립전쟁 이후 美 개척 본격화.. 옛 영토까지 대부분 잃게 돼
수십년간 지속됐던 영국과 프랑스 간의 북미대륙 식민지 쟁탈전은 1763년 영국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전리품으로 프랑스의 북미 식민지, 곧 뉴프랑스 영토 중 미시시피강 동쪽을 할양받은 영국은 옛 프랑스 요새를 접수하고 새로운 식민지 개척을 서두르게 된다. 이 과정에서 영국인들은 프랑스 식민지 지역에 살던 인디언들에게 지나치게 고압적인 자세를 취했다.
폰티악은 2009년까지 자동차 브랜드로도 사용됐기 때문에 미국인에게는 매우 친숙한 이름이다.
유럽인들이 미 대륙 원주민을 대하는 태도는 나라에 따라 크게 달랐다. 파크만은 그 차이를 이렇게 설명한 바 있다.
스페인은 인디언을 분쇄했고, 영국은 경멸하고 무시했으며, 프랑스는 인디언을 포용하고 품었다고 한다.
새로운 점령군으로 등장한 영국군의 태도와 정책에 대해 인디언들은 위기와 모욕을 느끼게 된 것이 전쟁의 근본적인 원인이었지만 1760년대 초 확산된 민족적 신앙운동도 한몫을 했다.
이 운동은 영국에 대한 불만과 함께 식량 부족과 전염병 확산으로 더욱 가속화됐다. '델라웨어의 예언자'로 알려진 네오린은 인디언들에게 백인들의 상품이나 술 그리고 무기를 멀리하도록 권했다.
네오린은 전통적인 인디언 신앙에 기독교적 요소를 결합시켜 백인의 악습에 물들게 되면 영국이 인디언의 존재 자체에 위협이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폰티악 전쟁 당시 영국군 최고 책임자였던 애머스트 장군은 인디언들에게 잔인하기로 악명이 높았다. 애머스트는 포로가 된 인디언들을 모두 죽이라고 지시를 내렸으며 현대전에서나 있을 법한 생물무기까지 동원했다. 그는 인디언들을 죽이기 위해서는 쓸 수 있는 모든 전략을 사용해야 한다면서 천연두 균을 묻힌 담요를 인디언들에게 공급하라고 지시했다. 민병대 지휘관 트렌트는 그 담요를 전달한 목적이 인디언들에게 천연두를 감염시키기 위한 것이었음을 밝혀주는 기록을 남겼다. 1766년 7월 25일 온타리오 요새에서 영국 측과 정식 정전협정을 체결함으로써 끝난 폰티악 전쟁은 흔히 인디언 측의 패배로 평가돼 왔지만, 현대의 사학자들은 무승부로 보고 있다.
인디언은 영국군을 몰아내는 데 실패했지만 영국도 인디언을 정복하지는 못했다. 전투에서의 승리가 아닌 협상과 중재로 전쟁이 끝난 것이다.
인디언은 영국 정부에 애머스트의 인디언 정책을 포기시켰기 때문에 일정 부분 승리를 얻었다고 말할 수도 있다. 폰티악 전쟁은 영국계 정착민들의 식민지 확대에 대해 많은 인디언 부족이 연합해 저항할 수 있는 가능성을 확인했다.
영국 정부는 이 전쟁을 통해 이주민과 인디언을 분리해 두지 않으면 안되겠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영국 정부는 소위 '1763년 선언'을 공표하고 동부지역의 백인 식민지와 애팔래치아 산맥 서쪽에 있는 인디언 땅 사이에 경계선을 그었다. 이 결과 애팔래치아 산맥에서부터 미시시피강에 이르는 거대한 땅 전체가 인디언의 영토로 인정받았다.
■고래 싸움에 등터진 인디언 부족
인디언의 땅에서 또 한 차례 전쟁의 회오리가 몰아쳤다. 동부의 13개 식민지가 영국의 지배로부터 벗어나 독립국가를 세우겠다고 전쟁을 일으켰다. 영국과 프랑스 사이에 전쟁이 벌어졌을 때와 마찬가지로 인디언 부족들은 누구 편에 서야 할지에 대해 고민에 빠진다. '1763년 선언' 이후 간신히 고향에서 생존을 유지해오던 오대호 인근과 오하이오 지역에 살고 있던 부족의 경우에는 더욱 심각한 갈등을 겪었다.
과연 어느 편이 자신들에게 유리할 것인가를 기준으로 의사결정을 내려야 될 텐데 이게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영국은 인디언들에게 자신의 편에 서야 미래를 보장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설득한 반면, 식민지 반군은 인디언들에게 중립을 지킬 것을 요구했다.
1775년 시작된 독립전쟁은 1783년에 끝났다. 그러나 종전 처리과정에서 인디언에 관해선 아무런 언급이 없었다. 영국 편에 서서 식민지군과 맞서 싸웠던 이로쿼이연합 소속 4개 부족은 영국의 패전으로 고향에서의 생존이 위협받게 되자 미국을 떠나 캐나다로 넘어갔다.
영국은 그들에게 참전에 대한 보답으로 오대호 너머 그랜드강 주변에 새로운 삶의 터전을 넉넉히 제공했다.
독립전쟁 후부터 미국은 애팔래치아 산맥을 넘어 빠른 속도로 변경을 서쪽으로 이동시켜 나갔다. 형식상으로는 수많은 조약을 체결함으로써 인디언들의 땅을 양보받았으나, 누구나 다 알고 있는 바와 같이 강제로 빼앗은 것과 그저 오십보백보의 차이에 불과했다. 1784년 체결된 '포트스탠윅스 조약'에 이어 거의 매년 인디언 땅을 양보받기 위한 조약들이 줄줄이 체결됐다.
■서북 인디언 전쟁
1787년 미국은 이른바 '서북영토법'을 제정해 오대호와 오하이오 일대를 아우르는 넓은 땅을 본격적으로 개척하기 시작했다. 자신의 생활터전이 백인 정착민에 의해 에워싸이는 데 대해 인디언들이 저항하는 과정에서 전쟁은 피할 수 없었다.
당시 미국 대통령인 조지 워싱턴은 인디언들의 반란을 제압하기 위해 대규모 병력을 투입했다. 그러나 미군은 인디언 연합세력에 크게 패하였다.
특히 1791년 생클레어 장군이 지휘하는 부대는 인디언과의 전투 사상 가장 많은 사상자를 냈다. 이 전투에서 미국 측은 623명이 전사하고 258명이 부상을 입었다.
이 밖에도 군대를 따라왔던 민간인 200명도 살해당했다. 워싱턴 대통령은 웨인 장군을 다시 분쟁지역으로 파견해 인디언들을 제압했다. 전후 처리를 위해 1795년 체결된 '그린빌조약'에 의해 인디언들은 옛 영토의 대부분을 잃게 됐다. 인디언들이 미국으로부터 받은 대가는 고작 2만달러어치 담요와 생활용품, 가축 등이 전부였다.
김철 전 한양대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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