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 최전방 GOP 장병들, 칠흑같은 밤.. 조국을 지키는 젊음들

파이낸셜뉴스       2015.12.30 20:49   수정 : 2015.12.30 22:22기사원문
그들의 하루는 어둠과 함께 시작된다
어둑한 오후, 군장검사 5분 전!
장병들의 동작이 빨라졌다. 40~50명이 움직이는 데도 절간같이 조용하다. 불빛이나 소음을 내지 않고 행동하는 것이 익숙한 그들이다.
악어소초엔 경례구호가 없다
경례구호는 부대의 특색이다. 경례구호 소리의 크기로 군기수준을 가늠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곳은 다르다. 구호가 없다. GOP의 특징이다.
한겨울 밤의 철책근무
7~8m의 높은 방벽을 가볍게 오르내린다. 언제라도 적군이 튀어나올 수 있다는 경계심으로 오감을 칼날처럼 곤두세운다.
승진보다 사명감
부대 부사관들은 한달에 한두번씩 자기 주머니를 털어 병사들에게 피자를 돌린다. 사기를 위한 일이다. 이런 게 바로 사명감인가 보다.



해가 지고 땅거미가 내려앉기 시작할 무렵. GOP소초가 활기를 띠기 시작한다. 보통의 직장인이라면 하루를 마무리하고 귀갓길을 서두를 시간이지만 최전방 GOP 장병들은 이 때부터 본격적인 임무수행 준비에 들어간다. 남들이 다 퇴근할 무렵이 이들에게는 출근시간인 셈이다.

"군장검사 5분 전!"

나지막하면서도 엄중한 목소리가 소초 내 방송을 통해 전파되자 장병들의 동작은 한층 빨라졌다. 40~50명이 생활하는 곳인 만큼 시끌벅적할 수 밖에 없건만 부산하게 오가는 와중에도 소음만큼은 절간같이 조용하다. 군대식 표현을 빌리자면 '기도비닉(아군의 활동이나 위치 등을 숨기는 행동. 불빛이나 소음을 내지 않도록 하는 것이 대표적)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대한민국의 진짜 최전방, 육군 제25사단 72연대 승전부대 '악어'소초의 하루는 어둠과 함께 시작됐다.



■조용한 경례… 최전방은 경례도 다르다

"부대 차렷! 소초장님께 대해 경례."

군대를 다녀온 대한민국 예비역이라면 다음에 무엇이 이어지는지 안다. 바로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경례구호다. 지휘관에 따라 경례구호 소리의 크기로 '군기수준'을 가늠하는 경우도 많기 때문에 경례구호는 일단 크게 지르고 봐야 한다는 것이 군대의 정설이다.

통상 '충성'이 제일 많지만 부대에 따라 '필승'이나 '단결' '통일' '돌격' 등 다양한 구호를 붙인다. 경례구호가 부대의 전통이나 특징을 상징하는 것이 되기도 하는 셈이다.

현역시절이나 예비역으로 전역한 이후 새로운 부대를 접할 때 마다 그 부대의 경례구호에 왠지 모를 관심이 은근히 생기곤 한다. 이날 악어소초의 경우도 마찬가지.

하지만 그런 기대는 여지없이 빗나갔다. 놀랍게도 악어소초에서는 경례구호를 붙이지 않았다. 경례구호 없이도 군인다운 절도와 패기가 느껴졌지만 통상의 부대가 근무자 신고 때 목청껏 경례구호를 외친다는 것을 감안하면 한편 당황스럽기도 했다.

사실 25사단의 경례구호는 '단결'이다. 하지만 수년전부터 야간경계근무 과정에서는 경례구호를 생략하는 것으로 지침이 변경됐다. 악어소초장 임무혁 소위(25)는 "다만 기도비닉을 유지해야 하는 GOP 소초의 특성을 고려해 경례구호를 생략하기로 했다"고 설명했다.



■'스마트'해진 철책선

어둠이 짙어지면서 휴전선 일대에 설치된 투광등에 불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도시의 불빛과 비할 바는 아니지만 철책을 따라 주변이 제법 환하게 밝아진다.

이 무렵이 되면 155마일 휴전선을 따라 설치된 각 GOP들은 전반야 근무자들이 투입되기 시작한다. 전반야는 해질 무렵부터 자정까지를 말하는 것으로, 전반야 근무는 통상 부사관인 부소초장이 지휘를 맡는다. 자정부터 다음날 새벽 해 뜰 무렵까지를 후반야라고 하는데 보통 장교인 소초장이 지휘한다.

과거에는 철책을 따라 설치된 매복진지를 따라 밤새 밀어내기식으로 근무했지만 수년 전부터 CCTV와 TOD 등 과학화.자동화 경계장비가 들어오면서 경계근무 형태도 많이 바뀌었다.

일례로 과거에는 철책을 일일이 손으로 만져보며 이상유무를 점검했지만 이제는 철책을 건드리지 않는다. 철책에 센서가 설치돼 있어 손을 대면 경보가 울린다. 최전방 철책선도 스마트해진 셈이다.

악어소초도 마찬가지. 과거에 비해 부담이 많이 줄었다는게 부대관계자들의 전언이다. 하지만 투광등이 곳곳에 설치돼 밝아졌다고 해도 도시의 불빛에 비할 바는 아니고 철책선이 스마트해졌다고 해서 사람이 살펴봐야 할 곳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과거에 비해 수월해졌다고 하지만 최전방 경계가 만만할리 없다.

■만만찮은 순찰코스

당장 경계근무를 서는 철책까지 가는 것만 해도 쉽지 않았다. 우선 첫 번째 철책에 설치된 소통문을 열고 들어가면 가파른 사다리를 타고 7~8m 높이의 방벽을 내려가야 했다. 겨울철에 눈이라도 내리게 되면 미끄러지는 것은 너무나도 뻔해 보였다.

매일 오르내리는 곳이다 보니 장병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내려갔지만 전역한지 20년이 다 돼가는 기자에게는 상당히 버거운 코스였다.

"위험하지 않나요?"

첫 관문부터 쩔쩔매는 것을 숨기려고 앞서가던 병사에게 말을 걸자 시큰둥한 표정이 돌아온다. '뭐 이 정도 갖고 그러느냐'고 말하는 듯 했다.

주근무지인 철책에 도착해도 난관은 계속됐다. 통행이 쉬운 곳에 철책이 설치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비교적 완만한 곳도 있지만 올라가기만 해도 숨이 막히는 급경사도 곳곳에 있다. 그나마 과거에 비해 많이 좋아졌다는게 부대관계자들의 전언이다.

악어소초 장병들은 매일 밤 이 길을 몇 번씩 반복해 지나다니고 있다. 언제 어느 곳에서 적이 튀어 나올지 모르는 만큼 오감을 칼날처럼 바짝 곤두세운 채 말이다.

부소초장 김동률 중사는 "적이 반드시 내 앞으로 온다고 생각하고 한치의 흐트러짐 없이 근무에 임하고 있다"고 전했다. 익히 들었던 말이지만 이상하게도 믿음이 갔다.

■최전방 근무해도 진급하기 힘들어

"GOP근무하고 나면 진급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나요?"

기자의 질문에 GOP소초들을 거느리고 있는 중대장 김기형 대위는 대답 대신 알수 없는 미소를 지었다. 여러 차례 최전방 근무를 했던 만큼 아무래도 좀 수월하지 않겠느냐 싶었지만 꼭 그렇지도 않다는 게 부대관계자들의 공통된 설명이다.전체 전력의 절반 이상이 휴전선 부근에 집중돼 있다보니 최전방 근무자가 그다지 특별한 존재는 아니기 때문이라고 한다.

"군인한테는 진급이 가장 큰 격려인데…좀 서운하겠네요."

안타깝고 안쓰러운 마음에 한마디를 던졌지만 이내 '아니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요즘은 GOP에 배치되는 병사들도 모두 지원을 받아 충원하고 있는데 전방근무 좀 했다고 간부가 진급이나 기대하고 그러면 안된다는 부대 관계자도 있었다.

"대한민국에서 군인이 전방근무를 하는 건 당연하지요. 그런 사명감없이 군인을 할 수 있겠습니까?" 승전대대 주임원사인 문덕진 원사의 말이다.

이날 문 원사와 승전부대 부사관단은 자기 주머니를 털어 악어소초 병사들에게 피자를 돌렸다.


문 원사를 비롯한 부대 부사관단은 돈을 거둬 한달에 한두번씩 피자와 같은 '사제음식'을 병사들에게 돌린다. 누가 시킨 것은 아니지만 그냥 그래야 할 것 같아 그런다는게 그들의 설명이다.

시킨 사람은 없지만 '그렇게 행동해야 할 것 같다'는 느낌. 그 느낌을 아마도 사명감이라 부르지 않을까 싶다.

ohngbear@fnnews.com 장용진 기자

Hot 포토

많이 본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