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강제이주정책 맞서 끝까지 저항한 전사.. 아파치 부족 용맹 상징하는 전설로 남아
파이낸셜뉴스
2016.02.25 18:16
수정 : 2016.02.25 18:22기사원문
아파치 인디언과 제로니모
1906년 옥중 자서전 발행하며 유명인사 돼
마지막 23년간 포로생활하다 1909년 사망
1994년 '서부의 전설' 기념우표로 나오기도
미국의 애리조나, 뉴멕시코, 텍사스, 콜로라도 등 남서부 지역과 멕시코 북부에 걸쳐 살고 있는 인디언 부족을 총칭해 아파치족이라 부른다. 나바호족도 광의의 아파치족에 속하나 분리하여 취급하는 경우가 많다. 아파치 언어가 캐나다 서북부 인디언의 말인 아타바스칸어에 속하는 것으로 보아 이들은 미국 대륙 북쪽의 추운 지역에서 지금 미국의 남서부 지역으로 1300년쯤 이주해 온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50년 아파치 전쟁의 시작
아파치 전쟁을 지휘한 인디언 전투추장으로는 전설적 게릴라 대장 제로니모를 비롯해 망가스, 코치스, 빅토리오, 델샤이, 톤토 등을 들 수 있는데 이들은 모두 아파치 부족의 영웅으로 추앙받고 있다.
■그랜트 요새 대학살
그랜트 요새에 근무하고 있는 휘트먼 중위가 인디언들에게 잘해준다는 소문이 퍼져 하나둘씩 평화롭게 살기를 희망하는 피날과 아라바이파 아파치족들이 모여들기 시작해 요새 인근의 아라바이파 강가에는 500여명이 거주하는 큰 마을이 형성됐다. 인디언을 혐오해 어찌해서라도 인디언을 쫓아내고 그 땅을 차지하고 싶은 백인들에게 이 평화로운 마을이 곱게 보일 리 없었다.
1871년 4월 28일 아침에 파파고 인디언 용병 94명을 데리고 6명의 미국인과 42명의 멕시코인이 투산을 떠나 인디언 캠프로 향했다. 파파고 인디언은 피날 아파치, 아라바이파 인디언과는 오랜 숙적 관계에 있었다. 투산을 떠난 일당은 4월 30일 새벽에 피날 인디언과 아라바이파 인디언 캠프에 들이닥쳤다. 남자들은 대부분 사냥하러 산속으로 가 있었기 때문에 피해자는 여자와 어린아이였다. 125명이 살해됐고 약 30명의 아이들이 파파고 용병에게 붙잡혀 노예로 팔렸다.
■제로니모의 세 차례 탈출과 네 차례 체포
제로니모를 포함한 약 70명의 아파치는 1877년부터 감금돼 있던 산카를로스에 있던 치리카우아족 주거지역을 1881년 9월 탈출해 국경을 넘어 멕시코의 시에라 마드레산으로 들어갔다. 1884년 2월에 제로니모는 크룩 장군과의 약속에 따라 주거지역으로 되돌아왔다. 그로부터 1년 정도는 큰 탈 없이 주거지역 생활이 계속됐다. 그런데 1885년 5월 제로니모는 130여명의 부족민을 이끌고 다시 주거지역을 탈출했다. 탈출 이유로 여러 가지 억측이 돌았지만 훗날 발간된 그의 자서전에 의하면 미국인들이 자신을 체포해 목을 매달 계획이라는 사실을 알아냈기 때문에 주거지역에서 빠져 나올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1886년 3월 크룩은 아파치 추장들과 멕시코 국경 너머에서 만나서 주거지역으로 들어갈 것을 종용했다. 제로니모는 이번에도 크룩을 믿고 하산했다. 그런데 제로니모 일행이 애리조나의 보위 요새까지 거의 다 왔다가는 다시 멕시코로 되돌아 가버렸다. 제로니모의 세번째 도주가 발생한 셈이다. 제로니모는 1886년 9월 4일 애리조나의 스켈리턴 캐년에서 마일스에게 공식적으로 투항했다. 그리하여 제로니모는 네번째로 백인들에게 붙잡힘으로써 기나긴 아파치족의 피비린내나는 저항은 막을 내렸다.
■아파치 인디언의 최후
아파치 인디언에 관한 악의적 신문 보도를 그대로 믿었던 당시 클리블랜드 대통령은 제로니모 일당을 교수형에 처할 생각이었다. 아파치 인디언들이 당한 과거의 역사를 들려주면서 사실을 있는 그대로 대통령에게 전달한 사람들이 있어서 이들은 극형은 면할 수 있었다. 그들은 열차의 가축수송용 화물칸에 태워져 플로리다의 감옥으로 갔는데 가는 도중에 2명이 세인트루이스 근처를 지날 때 열차에서 뛰어내려 1900㎞를 걸어서 애리조나로 돌아갔다고 한다. 제로니모 무리들은 1887년 5월에 앨라배마로 이감되었다가 1894년에는 다시 오클라호마의 실 요새로 옮겨갔다.
치리카우아 아파치족은 수감생활을 끝내고도 워낙 백인들의 미움을 사서 애리조나로 돌아가지 못하고 뉴멕시코의 메스칼레로족 거주지역으로 일부가 돌아오고, 나머지 인디언들은 그들이 마지막으로 수감됐던 오클라호마 지역에 남아 살게 되었다.
■제로니모가 남긴 유산
제로니모는 1829년에 태어나서 1909년 2월 17일 오클라호마의 실 요새 감옥에서 죽었다. 구술에 의한 그의 자서전이 1906년에 발행됐다. 제로니모가 죽인 백인이 몇 명인지는 본인도 모른다고 하듯이 정확히 알 수가 없다. 좀 과장해서 몇 천명이나 된다고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으나 대략 1000명을 넘지 않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 이유로 9·11테러의 주모자인 오사마 빈 라덴을 잡기 위한 작전에서 빈 라덴에게 제로니모라는 코드명을 붙인 바 있다. 그는 죽기 전 마지막 23년을 포로로 지냈다. 감옥 생활을 하는 동안에 그는 유명인사가 되었다. 1994년 10월 18일에는 미국 우편당국이 '서부의 전설들 시리즈' 중 하나로 제로니모 기념우표를 발행하기도 했다.
그의 이름은 용감의 상징으로 흔히 이용된다. 다이빙 직전에 두려움을 떨쳐내기 위해 '제로니모'라고 외치기도 하고 제2차 세계대전에서 낙하산 부대들이 비행기에서 떨어지면서 '제로니모'라고 외쳤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아파치라는 이름도 비슷한 상황에 쓰이는데 '아파치 헬리콥터'는 가공할 만한 전투력을 갖춘 미군의 주력 병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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