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대권력으로 변한 주자학

파이낸셜뉴스       2016.04.18 16:35   수정 : 2016.04.18 16:35기사원문



'사문난적(斯文亂賊). 유교의 교리를 어지럽히는 도적'이라는 이 말이 조선 중기 이후 정국을 뒤흔들며 사회를 경직시켰다. 나라에 충성하고 윗사람을 공경하라는 충효사상은 누구도 거스를 수 없는 규범이다. 하지만 이 도덕률이 국법 위에 놓이면서 조선 사회는 다양성을 잃게 되었다.

남송 시대 주희가 집대성한 성리학은 우주의 생성과 인간의 심성을 밝히는 심오한 유교 철학이다. 우리나라에는 고려 말 소개되어 조선의 건국이념이 되었고 이황, 이이 등 대학자에 의해 꽃을 피웠다. 우리의 주자학은 종주국 중국을 뛰어넘어 조선의 자부심이었다. 그런데 이 성리학을 무소불위의 권력으로 만든 사건이 벌어졌다.

숙종 때 윤휴라는 문신이 있었다. 1617년 태어난 그는 병자·정묘호란을 겪으며 벼슬에 나서지 않고 공부에 몰두했다. 그는 학문이 뛰어나다고 널리 알려져 몇 차례 천거로 관직에 나섰지만 사임을 반복했다. 그런 그가 58세 늦은 나이에 정4품에 발탁된 지 불과 4~5년 만에 대사헌, 이조판서를 거쳐 우찬성에 오르는 초고속 승진을 하면서 정치판에 휘말리게 되었다. 그는 남인의 선두에 서서 두 차례 왕이 상복을 얼마간 입어야 하는지에 대한 예송논쟁을 벌이며 송시열을 필두로 한 서인과 피나는 정쟁을 벌인 것이다. 그러나 1680년 남인인 영의정 허적이 집안 잔치에 궁실의 기름 먹인 천막을 무단 사용한 것이 발단이 되어 벌어진 경신환국 때 윤휴는 역적으로 몰려 사약을 받고 죽게 되었다.

세간에서 그가 사형을 당할 정도의 중죄를 지었는지는 의문이었다. 야사는 윤후가 죽을 때 "나라에서 유학자가 싫으면 쓰지 않으면 그만이지 죽일 이유가 있느냐"고 말했다고 전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의 죽음이 '사문난적' 때문이라고 믿게 되었다.

윤휴는 대학, 중용 등 유교의 핵심 경전에 독자적인 해석을 내놓았다. 그는 주자의 해석에도 거침없이 토를 달고 수정을 가했다. 주자는 예기에서 대학을 분리시킬 때 "대학의 도는 덕을 밝히고 백성과 친하며…"라고 시작되는 구절에서 '백성과 친하며(親民)'를 '백성을 새롭게 하며(新民)'로 바꾸어 놓았다. 윤휴는 이에 대해 주자가 섬김의 대상인 백성을 교화의 대상으로 바꾼 것은 잘못이라며, 예기의 원문대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 밖에도 주자가 만든 중용의 장과 절 구분도 새롭게 수정했다. 많은 친구, 동료들은 윤휴의 이런 행동을 우려하며 말렸다. 그러나 윤휴는 "천하의 이치를 어찌 주자만 알고 나는 모른단 말이냐"며 당당했다. 그러나 윤휴가 사형을 당하자 식자는 일제히 입을 다물게 되었다. 더 이상 그와 같은 혁신적인 비판은 허용되지 않았다.

지배층은 권력투쟁에 주자의 절대 권위를 이용했다. 주자가례에 따라 상복을 얼마동안 입어야 하느냐는 주장이 정권을 바꾸는 세상이었다. 권위는 충효-주자학-중화사상으로 이어졌다. 자신과 다른 노선을 걷는 당파와 유학자는 주자의 나라인 중국을 배반한 친 오랑캐 무리요, 사문난적으로 몰렸다.
물론 서양의 역사에도 교황의 권위가 절대적이었던 암흑의 시대가 있었다. 그러나 성리학의 고향인 중국에서도 이를 비판하는 양명학 등이 나왔고 우리로부터 주자학을 전수받은 일본도 고학, 군사학 등 다양성을 갖고 있었다. 조선에서는 권력의 수단으로 주자학을 정략적으로 이용한 것이 문제였다.

이호철 한국IR협의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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