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민 라면’과 ‘명품 라면’
파이낸셜뉴스
2016.09.30 18:03
수정 : 2016.09.30 18:04기사원문
우리나라에서 라면은 지난 수십년 동안 서민 음식의 상징이었다. 누구나 큰 비용부담 없이 든든히 한끼를 해결할 수 있기 때문이다. 'K푸드' 열풍을 타고 '한국 라면'을 선호하는 외국인도 늘고 있지만 아직도 일본 등의 그것에 비해 '싸구려 메뉴'라는 굴레에 갇혀 있다. 그나마 지난해부터 속속 등장하는 1500원대의 프리미엄 라면은 편법 가격인상이란 일각의 주장과 함께 일반 라면보다 두배 비싼 가격에도 시장은 날로 성장하고 있다. 소비자 사이에서 값싼 일반 라면을 그 나름대로의 '레시피'로 조리해 먹는 유행이 확산된 것도 프리미엄 라면 수요가 충분하다는 방증이다.
1인가구 증가와 가치소비 확산으로 일반 라면과 상대적으로 고가인 프리미엄 라면 시장이 따로 존재한다. 그런데도 라면 가격에 대한 정부나 시민단체의 시선은 과거 서민음식 시절에 머물러 있다. 실제로 몇 년 전 프리미엄 라면의 원조 격인 농심 '신라면 블랙'이 처음 등장했을 때의 일이다. 2011년 3월 출시된 신라면 블랙 가격은 현재의 프리미엄 라면인 '짜왕' 등과 불과 100원 차이인 1600원이었다. 기존 신라면의 780원보다 2배 이상 비싼 고급화 전략의 첫 시도였다. 그러나 국민과 시민단체들은 일제히 들고 일어났다. 라면 값을 올리기 위한 업체의 꼼수라는 게 이유다. 결국 정부 당국은 해당 기업에 대해 이례적으로 표시광고법 위반으로 제재조치를 내렸다. '설렁탕 한 그릇의 영양을 담았다'는 광고문구를 문제 삼았다. 허위·과장 표시와 광고를 한 것으로 인정된다며 공정거래위원회는 시정명령을 내렸고, 농심은 1억5500만원의 과징금 처분을 받았다.
정부의 이런 '눈물겨운' 노력에도 짜장, 짬뽕 등 프리미엄 라면 가격은 이제 1500원대에 팔리며 시장을 주도하고 있다. 이보다 앞서 공정위에 과징금을 부과받은 뒤 생산을 중단했던 비운의 '신라면 블랙'은 1년 후인 2012년 10월 재출시했다. 예전만큼은 못하지만 지금도 연간 20억원 이상의 매출을 올리고 있다.
조성봉 숭실대 경제학과 교수는 "공정위의 신라면 블랙에 대한 시정명령은 정부의 가격규제와 이를 회피하기 위한 기업들의 숨바꼭질이 나은 이 시대 최고의 '가격 규제 블랙코미디'"라며 "경제학 산업조직론 교과서의 사례 연구로 박스 처리할 수 있는 좋은 교재감"이라고 했다. 우리 국민은 800원이나 1500원 수준을 벗어나 전 세계에 자랑할 수 있는 '명품 라면'을 먹어볼 '사치'를 부릴 순 없는 걸까. '가성비(가격 대비 성능)'에 민감한 요즘 소비자들은 '고급진 한끼 라면'을 위해 얼마든지 지갑을 열 수 있는 세대라고 믿기에 하는 말이다.
win5858@fnnews.com 김성원 생활경제부 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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