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사마 야요이 '호박'

파이낸셜뉴스       2017.03.16 17:25   수정 : 2017.03.16 17:25기사원문
유년의 기억과 마주한 시간



1959년 뉴욕 브라타갤러리의 벽면은 흰색의 그물들로 가득 채워졌다. 무한히 계속되는 그물망은 현기증이 나게 하면서도 묘한 마력에 눈을 뗄 수 없게 만들었다. 동양의 한 여성 화가가 펼쳐낸 이 작업에 당시 평론가들은 최상의 찬사를 보냈다.

쿠사마 야요이(88)는 정신병이 있다는 사실로 더 많이 입에 오르내리는 작가다. 그의 정신병력을 듣고 나서 작품을 보면 대부분 "역시" 라고 말한다. 그렇게 끝없이 화폭에 그물망을 그려내고 점을 찍는 작업을 보통사람은 할 수 없다는 뜻일 것이다.

쿠사마는 전후 서양현대미술사에서 중요하게 평가되는 작가다. 1958년 미국으로 건너가 추상표현주의에서 미니멀리즘으로 전환되는 시기 뉴욕에서 회화, 조각 작업뿐 아니라 페미니즘적 행위미술과 설치작업 등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그러나 1973년 다시 일본으로 돌아와 1977년 스스로 정신병원에 입원해 지금까지도 병원에 거주하며 작업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그가 세계적으로 재조명받은 것은 2012년 프랑스 명품 브랜드인 루이뷔통이 그의 작품으로 콜렉션을 만들고 같은 해 미국 휘트니미술관에서 대규모 회고전이 열리면서부터다.

서양미술계에선 그의 '무한망(Infinity Net)' 작업이 높게 평가되는 반면 한국, 일본, 대만에서는 쿠사마의 호박 작품이 압도적으로 인지도가 높다.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으나 호박이라는 친근한 소재를 주 모티브로 사용했다는 점, 비교적 작은 사이즈의 회화작품들이 많아 접근성이 쉽다는 점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어린시절 집안에서 운영하는 종묘원에서 처음 호박을 본 쿠사마는 그 수수한 매력에 반해 교토에서 대학을 다니던 시절 전통 일본화 화풍으로 집요하게 호박을 그리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는 "달마가 돌벽을 마주하고 시간을 보낸 것처럼 나는 호박을 마주하고 시간을 보낸다"고 자서전에 쓰기도 했다. 평생 환각과 싸워온 작가는 자신의 작품에 열광하는 콜렉터들을 보며 과연 무슨 생각을 할까, 문득 궁금해진다.

이소영 서울옥션 스페셜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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