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구상조각의 전설, 구본주 작가 15주기 추모전
파이낸셜뉴스
2017.09.11 20:10
수정 : 2017.09.11 20:10기사원문
긴 하루를 마치고 돌아온 그가 외친다, "아빠 왔다"
하루를 마치고 집에 돌아가는 가장의 모습이 힘에 겨워 보인다. 퇴근 후 끝없이 이어진 회식으로 만신창이가 된 몸이 너무도 무겁다. 술에 만취해 가누기조차 힘든 몸으로 거리를 비틀비틀 거리다 노상방뇨를 하려는데 방금 전 태우기 시작한 담배 장초가 아까워서 손이 아니라 얼굴을 벽에 대고 섰다.
한국 구상 조각의 전성기를 이끌어냈다는 평을 받는 천재 조각가 고 구본주 작가(1967~2003)의 2000년작 '아빠의 청춘'이다.
전시장 4개층은 각각 '사는 게 뭔지', '노동자의 깃발은 무엇으로 지켜지는가', '이 과장의 40번째 생일날 아들에게 해주고 싶은 이야기', '너의 느낌, 그것이 진실이다'라는 소주제로 꾸려졌다.
이를 통해 '이 과장'이라는 익명의 개인이 직장, 사회, 가족 안에서 겪는 하루를 스토리 형식으로 풀어냈다. 회사에서 눈칫밥을 먹으며 구석에 숨어 담배를 피우고, 거리에 나가 노동자의 권리를 외치고, 동료들과 소주 한 잔 걸치고 돌아오는 퇴근길에 전봇대에 서서 오줌을 싸는 이 과장의 초상은 우리네 아버지들의 주름진 시간과 오늘날 우리가 겪는 현실까지도 여과없이 보여준다.
이번 전시에는 구본주의 대표적인 목각 작품과 함께 흙, 청동, 철 등 전통적인 조각의 재료를 자유자재로 다룬 그의 대표작 30여점이 동문모텔II 전관을 채웠다. 꼭 스토리를 따라가며 보지 않더라도 각각의 작품이 던지는 메시지는 하나하나 강렬하다.
각각의 작품은 1990년대와 2000년대 초반에 제작됐는데 여전히 우리의 삶과 맞닿아 있어 울림이 크다. 한때 청운의 꿈을 품었지만 현실의 벽에 부딪혀 일상을 분주히 살아가다 문득 그림자를 보며 느끼는 회한의 감정이 그의 1993년작 '배대리의 여백'에 담겨져 있고, 세상에 말하고 싶지만 어느새 가슴이 텅비어서 소리조차 낼 수 없는 상황에서 고개만 끄덕이는 예스맨이 되어버린 직장인의 모습을 형상화한 '생존의 그늘' 등의 작품을 보고 있으면 남 이야기가 아닌 것처럼 가슴이 짠하다.
jhpark@fnnews.com 박지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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