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유사 ‘주 52시간의 덫’… 정기보수땐 ‘근로기준법 위반’

파이낸셜뉴스       2018.04.23 17:07   수정 : 2018.04.23 21:51기사원문
대규모 설비 운영 특성상 주 70~80시간 근무 불가피
탄력근무제에 희망 걸었지만 다른날 단축근무도 쉽지않아
최악의 경우 근로기준법 위반 업계, 내달 정부에 건의키로

오는 7월 주52시간 근로시간 단축 시행이 두 달여 앞으로 다가오면서 국내 정유화학산업이 일대 혼란에 빠졌다.

특히, 정유화학사들은 대규모 설비를 운영관리하는 장치산업 특성상 통상 2~3년꼴로 단행하는 대규모 정기보수(TA) 기간에 주당 70~80시간의 집중근무가 불가피하지만 아직까지 뚜렷한 대책을 마련하지 못하고 있어서다.

정유화학업계는 특정기간 초과근무를 허용하는 탄력근무제를 그나마 대안으로 보고 있지만 정부가 허용할지 여부도 불투명하다.

이대로라면 당장 올 하반기 정유화학사들의 근로기준법 위반 사례가 속출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게 됐다.

■'법 시행 두 달여 앞인데' TA 어쩌나

23일 관련 업계에 따르면 오는 7월부터 300인 이상 사업장을 대상으로 주당 근로시간을 52시간으로 제한키로 하면서 대상업종인 정유화학사들은 대책마련에 고심하고 있다. 정유화학업종은 대규모 설비지만 최소한의 운영인력을 투입하는 장치산업이다보니 현행 4조3교대 방식으로도 주 52시간 근무를 준수할 수 있다. 문제는 2~3년에 한번씩 돌아오는 대보수(TA)가 큰 걱정거리다.

통상 정유공장은 3년, 화학공장은 4년 주기로 한번씩 대보수를 진행한다. 설비 안정성과 운영 효율성을 개선하는 대보수 기간에는 핵심설비를 비롯한 공장 전체 설비의 가동을 중단하고 점검을 벌인다. 보통 수 천억원이 투입되는 대보수 기간은 30~45일 정도씩 걸린다. 이밖에도 매년 1~2주씩 걸리는 소규모 정기보수들도 여럿 진행한다.

막대한 비용과 가동중단에 따른 손실을 최소화기 위해 대보수기간에는 전체 인력이 투입돼 초과근무를 진행하는 게 일반적이다. 정유사 관계자는 "보통 한달 이상 걸리는 대보수는 외부 전문업체에 위탁하지만 내부 직원들이 함께 투입돼 집중근무를 할 수 밖에 없다"며 "시간이 돈이다보니 대보수 기간을 최대한 단축하기 위해 주당 70시간 이상씩 근무하는 게 보통"이라고 말했다.

당장 올 하반기 국내 주요 정유화학사들의 대보수 일정이 줄줄이 예정돼 있다. 정유사는 SK이노베이션 울산공장, 현대오일뱅크 대산공장이 하반기 대보수에 잇따라 들어간다. GS칼텍스는 올초 대보수를 먼저 진행해 급한 불은 끈 상황이다.

화학업계도 LG화학, 롯데케미칼, 한화토탈, 금호석유화학 등 대다수 기업들이 올 하반기부터 내년까지 납사크래커(NCC) 생산설비 등 주요 제품을 생산하는 공장들의 정기 보수 작업이 예정돼있다.

■탄력근무제도 해법안돼… 비현실 정책에 부글구블

주52시간 근로 단축이 코앞이지만 정유화학사들은 뚜렷한 해법을 찾지 못하고 있다.

SK이노베이션 관계자는 "내부적으로 다양한 시나리오를 마련중이지만 대보수 문제를 해결할 확실한 방안은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며 "노조와의 합의도 필요한 만큼 최대한 서둘러 방안을 마련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현대오일뱅크 관계자는 "법을 준수하고 공장을 원활하게 운영할 수 있는 방안을 찾고 있다"고 전했다.

GS칼텍스는 최근 주52시간 근로제 시행을 앞두고 '노사공동 인력경쟁력향상 태스크포스(TF)'를 꾸려 '탄력근무제' 도입을 원칙적으로 합의했다. GS칼텍스 관계자는 "대보수에 대비해 원칙적으로 탄력근무제 도입에 노사가 합의했지만 세부 근무방안은 아직 마련중"이라고 밝혔다. 다른 정유화학사들도 근로시간을 탄력적으로 운영하는 탄력근무제나 유연근무제를 유일한 대안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탄력근무제도 확실한 해법은 아니라는 지적이 나온다. 업계 관계자는 "예를 들어, 대보수기간에는 주당 70~80시간씩 근무하고, 통상 근무때 그만큼 근로시간을 줄이는 게 탄력근무"라며 "하지만, 장치산업인 정유화학공장은 대체 인력이 부족해 한달 이상 걸리는 대보수기간의 초과근무를 평소에 단축하기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밝혔다.

또다른 정유사 관계자는 "현재 4조3교대 방식은 공장 효율성을 극대화하는 근무방식이라 근로시간을 단축하려면 인력 충원밖에는 방법이 없다"며 "하지만, 3년에 한번하는 대보수 외에는 필요가 없는 잉여인력을 뽑을 기업이 있겠느냐. 이런 현실성없는 정책을 밀어부치는 건 전형적인 탁상행정"이라고 지적했다.


이 때문에 최악의 경우 올 하반기 정기보수를 진행하는 정유화학사들이 줄줄이 근로기준법 위반 사업장이 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발등의 불인 석유화학업계는 조만간 정부에 대책 마련을 건의할 계획이다. 석유화학업계 관계자는 "이달 초부터 석유화학협회가 정기보수기간 근로시간 단축 문제에 대해 기업들의 의견을 모으고 있어 이르면 다음 달 정부에 건의안을 전달할 예정"이라며 "국가산업경쟁력 보호 차원에서라도 정기보수 기간은 주 52시간 근로 예외를 허용해 줘야 한다"고 밝혔다.

cgapc@fnnews.com 최갑천 조지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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