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에 묶인 대주주 의결권…떼지어 오는 헤지펀드 어떻게 막나
파이낸셜뉴스
2019.01.29 17:15
수정 : 2019.01.29 17:15기사원문
3.흔들리는 기업지배구조
소버린·엘리엇 사태 겪고도 무리한 상법 개정안 진행
2%, 3% 소액주주 연합땐 5% 의결권 행사할 수 있어
배당 확대 등 단기수익 노리면 장기 경영전략 세우지도 못해
국내 기업들이 경영권 방어에 전전긍긍하고 있다. 경영권을 방어할 수단이 거의 없는 상황에서 기업지배구조 개선 관련 제도들이 속속 도입되고 있어서다. 지난해 국민연금이 본격적으로 스튜어드십 도입을 선포했고 글로벌 헤지펀드들이 삼성그룹과 현대자동차그룹을 정조준하기도 했다.
최근에는 글로벌 행동주의 펀드라고 주장하는 헤지펀드들이 대거 등장해 기업 경영권을 위협하고 있다. 더 큰 문제는 기업지배구조 개편을 주로 담은 상법 개정안도 활발하게 논의되고 있다. 재계 관계자는 "최저임금 인상, 주 52시간 도입 등이 경영환경의 당면 문제라면, 경영권 방어는 생존의 문제"라고 지적한다. 현재 기업들이 경영권 방어를 위해 할 수 있는 것은 막대한 재원을 투입해 자사주를 사는 것밖에 없다고 입을 모은다. 경영권 방어가 되지 않는 상태에서 투자와 고용을 늘리는 것은 어불성설이라는 것이다.
지난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외국인의 상장주식 10% 이상 취득 제한 조치가 사라지면서 국내 기업들은 종종 해외 헤지펀드들의 먹잇감이 됐다. 가장 대표적인 케이스가 소버린과 SK 사건이다. 헤지펀드인 소버린은 2003년 SK 주식 14.99%를 매집하고 1조원 가량의 시세 차익을 본 뒤 2005년 철수했다. SK는 당시 1조원에 이르는 자금 투입으로 자사주를 매입, 경영권을 지켜냈다. 2006년 칼 아이칸 역시 KT&G 주식을 매입해 사외이사 1명을 이사회에 진출시키고 1500억원 가량의 매도 차익을 얻은 뒤 철수했다.
최근에는 미국계 헤지펀드인 엘리엇이 국내 주요 기업들의 지배구조 개편을 계기로 지분을 매입해 수익을 극대화하고 있다. 2015년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 추진 당시 엘리엇은 삼성물산 지분 7.12%를 매입한 뒤 합병비율이 삼성물산 측에 불리하다며 이의를 제기했다. 현재는 삼성물산을 향한 모든 소송을 취하하고 정부를 상대로 투자자와 국가 사이의 소송(ISD)을 벌이고 있다. 현대자동차 역시 엘리엇의 공격으로 순환출자 구조를 해소하는 내용의 지배구조 개편이 물거품 되기도 했다. 엘리엇은 현대차그룹에 배당 확대 등을 꾸준히 요구하고 있다.
앞으로 이런 공격은 더욱 거세질 전망이다. 경제 단체 관계자는 "국내 기업들이 과거와 달리 글로벌화되면서 해외 헤지펀드에 많이 노출되고 있다"며 "특히 자사주 매입 외에 경영권 방어 수단이 없는 것을 이용해 공격할 가능성이 크다"고 밝혔다.
글로벌 행동주의 헤지펀드도 우후죽순 생겨나고 있다.
한국경제연구원이 행동주의 헤지펀드 관련 데이터 조사업체인 '액티비스트 인사이트'의 연간보고서를 분석한 결과, 주주행동주의를 적극 펼치고 있는 글로벌 헤지펀드는 2013년 상반기 275개에서 지난해 상반기 524개로 90% 증가했다. 이들이 경영에 개입했던 타깃 기업 또한 같은 기간 570개에서 805개로 늘었고 애플, P&G와 같은 글로벌 기업들도 포함됐다. 특히 아시아 기업을 대상으로 한 경영개입은 2011년 10회에서 2017년 106회로 늘렸다.
■대주주 권한 막는 상법 개정안 우려
이런 상황에서 경영권을 위협할 수 있는 상법 개정안도 활발하게 논의되고 있어 재계의 우려를 키우고 있다.
감사위원 분리선임, 집중투표 의무화, 다중대표 소송제 도입 등이 대표적이다. 감사위원 분리선임은 기업의 감사위원을 따로 선임하되 모든 주주의 의결권을 3%로 제한하는 게 주요 내용이다. 재계는 현재도 감사위원 선임 시 대주주 의결권이 3%로 제한되는 상황에서 감사위원 분리 선임까지 의무화될 경우 대주주의 감사위원 선임에 대한 의사결정권은 제약되고 펀드나 기관 투자자가 더 큰 영향력을 발휘할 가능성이 크다고 우려하고 있다. 예를 들어 최대주주는 지분이 많아도 3%밖에 의결권을 행사할 수 없으나 3%, 2%의 지분을 지닌 주주들이 연합할 경우 5%의 의결권을 행사할 수 있게 된다. 재계 관계자는 "(이렇게 되면) 배당 확대 등 단기적인 수익 실현에 도움이 되는 경영전략에 치중할 가능성이 크다"고 지적했다.
신석훈 전 한국경제연구원 실장은 이런 상황을 염두에 두고 국내 기업들이 해외 헤지펀드들의 '울프팩(늑대 떼) 전술'에 희생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여러 헤지펀드가 5% 이하 지분을 보유하며 공시의무를 회피하고 있다가 별안간 공동 전선을 구축해 기업을 공격하는 전술이다. 그는 "처음에는 늑대가 한 마리인 줄 알았다가 어둠 속에서 번쩍이는 수십 또는 수백 마리의 눈과 마주치는 순간 모든 것을 자포자기하게 된다. 상법 개정안이 국내 기업들을 이런 상황에 처하게 하는 것은 아닌지 염려된다"고 했다.
집중투표제 역시 경영권 분쟁을 유발할 수 있다. 이 제도는 각 주주가 1주마다 선임할 이사의 수만큼 의결권을 갖도록 한 제도다. 소액주주가 지지하는 이사가 선임될 가능성이 높아져 소액주주 보호에 도움이 될 수 있지만 제도가 악용될 경우 집중투표로 선임된 이사와 다른 이사들 간의 갈등이 초래될 수 있다. 한국경영자총협회에 따르면 미국, 일본은 과거 집중투표제를 도입했으나 경영권 분쟁이 빈발하고 회사 설립 기피 현상까지 발생하자 자율적 선택방식으로 전환하거나 요건을 대폭 강화했다. 현재 러시아, 중국, 사우디아라비아 등 극소수 국가만 이 제도를 운영하고 있다.
재계 관계자는 "대주주 의결권을 지속적으로 제한하면 소액주주들의 권리 강화라는 측면보다 3% 내외의 지분을 갖고 단기 시세 차익을 노린 헤지펀드들에 유리하게 악용될 가능성이 크다"고 강조했다.
pride@fnnews.com 이병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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