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혜석, 여성운동가인가···수원시 거두절미식 미화 시비
뉴시스
2020.03.05 09:49
수정 : 2020.03.05 09:49기사원문
【수원=뉴시스】김경호 박다예 이병희 기자 = 경기 수원시가 개항기 이후부터 일제강점기까지 신식 교육을 받은 신여성인 정월(晶月) 나혜석(1896~1948)의 '이혼고백서' 일부 내용 만을 부각시켜 '여성운동가', '선각자'로 미화헸다.
수원시는 홈페이지 '수원의 인물'에서 나혜석을 "1921년 최초로 그림 전시회를 개최한 우리나라 최초의 여자 서양화가이자 소설과 시를 발표하기도 한 문학가"라며 "남녀가 서로 평등하다는 생각을 일찍부터 갖고, 이런 생각들을 여러 사람에게 전하는 역할을 하기도 한 선각자이다"라고 소개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나혜석이 1934년 '삼천리'에 발표한 '이혼고백서'와 1935년 발표한 '신생활에 들면서'의 내용 일부 를 인용, 침소봉대했다는 지적이다.
수원지역 인문학자는 "개인에 대한 평가는 역사적으로 행적이나 사실관계를 가지고 이뤄져야 한다"며 "일제강점기에 기회주의적인 삶을 살아온 사람들에 대한 명확한 평가가 없다면 후세들은 그런 쪽에 서야 이익을 볼 수 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고 지적했다.
또 "나혜석은 미술이나 문학 등에서 두드러진 개인적인 창작활동을 해온 신여성"이라며 "조직적인 운동의 관점에서 창작활동을 한 적이 없다. 여성운동가라는 주장은 적절하지 못한 평가다. 그의 작품활동은 당시 사회에 대한 개인적인 일탈일 뿐"이라고 봤다.
◇'이혼고백서' 일부 내용만 부각, 미화
"조선 남성 심사는 이상하외다. 자기는 정조 관념이 없으면서 처에게나 일반 여성에게 정조를 요구하고 또 남의 정조를 빼앗으려고 합니다."
'아혼고백서'에 있는 글이다. 수원시는 이혼고백서 내용 가운데 이같은 일부 내용만 발췌해 드러내면서 나혜석을 여성운동가나 선각자로 부각했다.나혜석이 남녀평등을 위해 힘쓰고, 이러한 생각을 전파하는 선각자 노릇을 했다는 것이다.
이혼고백서는 나혜석이 경험한 결혼 과정, 11년 동안의 부부생활, 주부로서의 화가생활, 시집과의 갈등, 유럽여행, 최린과의 불륜, 이혼 과정 등을 적은 글이다.
옛 애인이 폐병으로 숨진 뒤 만난 김우영의 구애부터 유럽 여행 뒤 시어머니 선물을 사 오지 않아 갈등이 빚어진 이야기, 유럽에서 만난 최린과의 관계 등이 상세히 나와 있다.
나혜석의 이혼 문제가 불거진 것은 나혜석이 최린에게 보낸 편지를 김우영이 알게 되면서부터다. 나혜석은 유럽, 미국 여행 뒤 생활이 궁핍해지자 최린에게 손을 내민다.
남편 김우영(친일파)은 최린(민족대표 33인, 친일파로 변절)과 나혜석의 불륜 사실을 알고 분개해 나혜석에게 이혼을 요구한다.
하지만 세상에 알려진 것처럼 나혜석이 이혼을 단행하고, 김우영의 이혼 요구에 당당히 맞선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혼을 할 수 없다고 매달렸다. 팔순 노모와 자식 4남매 때문에 떠날 수 없다며 "현모양처가 되겠다"고 하지만, 김우영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결국 이혼장에 도장을 찍지 않으면 불륜에 대해 고소하겠다는 김우영의 요구에 "2년 동안 재가 또는 재취하지 않되, 피차 행동을 봐 복구할 수 있기로 한다"는 내용의 서약서와 위자료로 논 문서(당시 500원)를 받은 뒤 1930년 11월20일 합의이혼한다.
이후 김우영이 다른 여자와 살고 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은 나혜석은 김우영을 찾아가 "나 살 도리를 차려달라"며 생활비를 청구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나혜석은 경제적으로 궁핍해지자 1934년 8월과 9월 삼천리에 '이혼고백서'를 게재하고 같은 해 9월 곧바로 최린을 상대로 "불륜 때문에 이혼에 이르게 됐다"는 '정조유린 위자료 청구 소송'을 냈다. 나혜석은 최린에게 1만2000원을 요구했지만 최린은 2000원을 주고 소송을 취하해달라고 해 결국 합의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하지만 수원시는 나혜석의 이런 삶 전체를 언급하지 않고, 일부분만 부각시켜 '당당한 삶을 산 여성', '선각자'로 미화해왔다.
수원시의 학예사는 "나혜석은 모된 감상기, 이혼고백서 등의 글을 통해 당시 파격적일 수 있는 글을 썼고, 이 글을 잡지 등을 통해 드러냈기 때문에 이 자체를 하나의 운동으로 보는 것"이라며 "신여성이 여성운동가다. 나혜석은 당시 신문물을 받아들였던 신여성이자 여성운동가인 것"이라고 해석했다.
수원시의회 윤경선(민중당, 금곡·입북동) 의원은 그러나 "역사적 인물을 기리는 데는 다 함께 납득할 수 있는 행적이나 기준, 공적이 있어야 한다. 나혜석이 일제시대 우리 민족과 여성 삶을 위해 산 여성운동가라는 부분에 (사회적) 합의가 없다. 구태여 그런 분을 기리는 것은 이해 안 간다"며"여성운동가는 조직을 만들어서 여성 권익 향상을 위해 굉장히 많을 일을 한 분들이다. 나혜석은 자기 개인적 이야기를 한 것뿐이다"고 반박했다.
아울러 "공지영 작가 등 많은 여성 작가가 여성들의 삶에 대해 쓰지만 그들을 여성운동가라고 하진 않는다"며 "훌륭한 여성운동가가 많은데 유독 나혜석만 거리도 만들고, 생가터 문제 등도 이해가 안 간다. 시대를 앞서 살았을 수도 있겠지만, 여성운동가로서 수원시 차원에서 기릴 업적은 아닌 것 같다"고 덧붙였다.
강연희 전국여성연대 전 집행위원장은 "그냥 신여성이지, 여성운동가로는 볼 수 없다. 여성운동이라고 하면, 독립운동도 마찬가지지만, 목적성이 분명하다. 현 촛불혁명처럼 모두가 독립을 외쳤을텐데 구체적으로 나혜석은 무엇을 했나? 없다"며 "여성운동이라고 하면, 예를 들어 조선시대 을밀대 올라갔던 강주룡이라고, 조선시대 최초 고공농성을 했던 분이 있다. 이 분은 처우 개선에 대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지붕에을 올라갔다. 운동은 목적성이 분명하다. 당시 여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목적이 분명한데, 여성의 문제를 직접 실천을 통해 해결하기 위한 것이 여성운동이다"고 설명했다.
이어 "나혜석은 그냥 그림 잘 그리고 유복한 환경에서 유학을 갔다 온, 자유주의적 여성이라고 판단한다. 여성운동이라고 볼 수 없다. 단지 당시의 신여성일뿐 여성운동을 한 것은 아니다"며 "그는 (일제의 지원으로) 세계 여러 곳을 다녔다. 그게 친일파지···. 당대 가부장적 상황에서 본인만 혼인계약서를 쓸 게 아니라 조선 여성들이여 이렇게 합시다 하는 호소문이 필요했다"면서 "나혜석은 그런게 없다. 이를 통해 누구를, 무엇을 바꿨나. 대중을 통한 실천이 없었다"고 짚었다.
◇나혜석 작품, 일본 것들과 매우 흡사
"모든 사람에게 허락할까, 한 사람에게도 허락하지 말까."
"여러 사람에게 허락해 순간순간 쾌락으로 살아갈까, 혹은 한 사람에게도 허락지 말아 내 마음을 지키고 살까."
"정조는 도덕도 법률도 아무것도 아니요, 오직 취미다. 밥 먹고 싶을 때 밥 먹고, 떡 먹고 싶을 때 떡 먹는 거와 같이 임의용지(任意用地)로 할 것이요, 결코 마음의 구속을 받을 것이 아니다."
나혜석의 당찬 주장으로 알려진 '정조 취미론'은 일본의 영향을 수용한 결과다.
일부 학계에서는 당시 여성의 정조와 자아 해방을 연결시켜 고찰했고, 이를 인권문제로 확산시킨 일본 작가 요사노 아키코(1878~1942)의 글을 가져온 것이라는 의견을 제기했다.
요사노는 "더 이상 정조는 도덕도 진리도 아니다 ··· 정조는 어떤 사람에게는 취미이며, 기호이며, 버릇이다"라는 주장을 펼쳤다. 나혜석의 글과 같다.
나혜석이 임신한 뒤 예술가로서 앞길 걱정, 육아와 출산에 대한 두려움·괴로움 등의 감정을 표현한 작품인 '모된 감상기'도 일본의 여성주의자이자 작가인 히라츠카 라이초(1886~1971)의 글을 종합한 것이다. 김복순 명지대 교수가 ‘조선적 특수의 제 방법과 아나카 페미니즘의 신여성 계보-나혜석의 경우'라는 논문을 통해 규명했다.
나혜석은 결혼이라는 단어 대신 '공동생활'을 쓴 히라츠카의 글을 '공동생애'로 바꿔 언급했다.
"내가 사람의 모(母)가 될 자격이 있을까 ··· 자식이 생기고 보면 내 개인적 발전상에는 큰 방해물이 생긴 것 같았다 ··· 어찌나 슬펐는지 몰랐다. 나는 자격 없는 모 노릇하기에는 너무 양심이 허락하지 아니하였었다."(모된 감상기)
"지금의 나에게는 아직 어머니가 될 수 있는 만큼 충분한 내적 준비가 돼 있지 않다고 생각한다 ··· 아이를 기르며 일과 공부가 계속될 수 있을까? 개성을 신장시키고자 하는 자신의 생활과 어머니로서의 생활 사이에 조화를 얻을 수 있을까?"(히라츠카 라이초)
나혜석의 정조론과 모성론은 이미 1910년대 일본에서는 논쟁으로까지 발전해 이론화된 내용이다. 나혜석은 일본에서 유행한 것을 우리나라에서 1930년대에 발표, 주목받은 것이다.
수원시 학예사는 "일본 작가의 글을 인용한 것은 일본에서 공부했을 당시 영향을 받은 것이고, 그런 글을 쓴 자체로가 파격적이고 창의적인 것"이라며 "글을 써서 드러낸 것 자체로가 사회에 대한 도전이다. 이를 여성운동의 시작이자 시초로 평가하는 것"이라고 답했다.
여성운동가 임미숙씨는 "나혜석은 삶을 통틀어 개인 중심의 자유로운 일탈적 삶을 살았다고 생각한다"며 "독립을 위해 희생하고 헌신한 여성운동가와 같이 평가되는 것은 맞지 않다. 그냥 신여성으로 한국최초 여성서양화가로 시대적으로 가슴 아픈 삶을 살았다 정도이면 될 듯하다"고 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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