땀과 눈물의 바다

파이낸셜뉴스       2021.09.08 15:00   수정 : 2021.09.08 14:59기사원문



해양경찰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아찔한 경험을 한다. 험난한 바다 환경에서 겪게 되는 기적같은 구조 상황. 그런 경험은 수많은 생명을 구조하여 세간의 이목을 끌기도 하고 혹은 구조에 실패해 여론의 질타를 받기도 한다. 격랑을 헤치고 다다른 현장이 오인신고이거나 자체 해결이 가능한 위급 상황이 아닐 때, 깊은 안도와 허탈이 교차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다양한 상황이 해양경찰에서 회자되는 것은 경각에 달린 국민의 위험 앞에 목숨 걸고 현장으로 향한 공통의 기억이 있어서일 것이다.

나에게도 그런 순간이 있었다. 제주 해경의 대형경비함정 부장으로 근무하던 2003년 겨울. 제주도에서 남쪽으로 약 300km 떨어진 바다 한가운데서 3000t급 철광석운반선이 기관고장으로 조난되는 사고가 발생했다. 풍랑경보가 발효된 해상에는 5m가 넘는 파도가 우리를 맞았다. 조난선 위치가 서울에서 부산 거리만큼 멀었지만 조난선의 안전이 확보되지 않아 마음이 급했다. 조난 현장까지 10시간의 전속항해는 말그대로 난장판이었다. 파도와 너울에 뱃머리가 물속으로 들어갔다가 이내 하늘로 솟구치면 조타실이고 통신실이고 제대로 서 있기도 힘든 상황이 된다. 주방에서 그릇이 쏟아지는 요란한 소음이 들리고, 이어서 캐비닛을 묶은 줄이 끊어지면서 서류가 쏟아지고, 책상 서랍이 모조리 튀어나오기도 했다. 자정 무렵 도착한 현장에서는 칠흑의 어둠과 너울파도 속에 조난선의 실루엣과 불빛이 보였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100미터가 넘는 길이에, 화물무게까지 1만t에 가까운 화물선이 마치 바다괴물이 몸부림치듯 보이는 한밤의 캄캄한 바다. 뱃전을 넘은 파도가 강풍에 날리면서 얼굴을 찌르듯이 쏟아지는데, 예인줄 연결 작업은 심한 풍랑에 실패를 거듭했다. 결국 해양경찰관 3명을 고무보트에 태워 바다로 내렸다. 와이어로프를 예인줄로 사용할 수 있도록 연락줄을 매달아, 세차게 넘어오는 파도를 거슬러 조난선으로 향하게 했다. 동시에 선미 갑판에서는 와이어로프가 물에 가라앉지 않도록 일정간격으로 부력재를 설치하는 작업이 분주했다. 검은 바다 위에서 위태롭게 멀어지는 해경 보트에 조난선 10명의 안위가 달려있었다. 천신만고 끝에 예인줄 연결작업을 마치고, 해경 대원들도 무사히 복귀했다. 이제부터는 돌아가는 길이 걱정이다. 1만 톤의 화물선을 예인하면서 풍랑 속을 헤쳐가려면 평소보다 속도를 더욱 줄여야했다. 우리 걸음보다 조금 빠른 속도라면 적당할테다. 예인줄로 연결된 두 선박의 느린 속도는 파도에 더욱 흔들리게 했고, 갑판을 넘어서 들어온 바닷물까지 뒤섞여 선내는 엉망이었다. 이럴 때는 그릇을 놓을 수가 없어 식사도 편하게 하기 어렵다. 교대로 쉬려고 해도 배가 기울어진 모양대로 몸이 쏠리고 미끌어지면 제대로 쉴 수도 없었다. 총 예인시간 65시간 27분. 폭풍우를 뚫고 제주에 도착했을 때는 3일이 지나 있었다. 날은 어느새 개었고, 세차게 몰아치던 파도와 바람도 잦아들고 있었다. 조난선과 선원들을 모두 안전하게 인계한 후 고맙다고 연신 허리를 굽히는 조난선 선장님과 선원들의 인사에 녹초가 돼 있던 우리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물적·인적 피해가 하나도 없는 성공적인 구조. 언론 보도에는 '제주도 남쪽 해상 조난 화물선, 해양경찰이 구조' 정도로 짤막하게 소개됐지만 그 행간에는 한겨울의 바닷물을 뒤집어쓰면서도 땀에 젖었던 우리 해양경찰의 목숨 건 사투가 스며있다고 말씀드리고 싶다.

이후에도 경비함정의 함장을 거치며 많은 일을 겪었지만 이 날의 일은 20년이 다 되어 가는데도 기억이 뚜렷하다. 해양경찰 본청 종합상황실장과 경비과장을 거쳐 경비국장으로 근무하는 동안에는 전국 바다에서 해양사고 소식이 들려올 때마다 이 날의 일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모든 사고 현장이 제주도의 그날 밤처럼 느껴져서 아찔하면서도 모두의 안전을 간절히 응원해야 했다.바다에서 사건사고는 주로 악천후에 발생한다. 해양사고 현장까지 최단거리로 가려면 거친 바람과 파도가 경비함정을 위험에 처하게 만든다. 그렇다고 안전항로를 택하면 조난을 당한 국민의 안전이 위태로워진다. 위험에 처한 국민을 생각하면 마음 속 잠깐의 갈등이 곧 길을 찾는다. 국민의 안전이라는 단어의 이면에는 현장 직원의 위험이 포함돼 있다. 남해지방해양경찰청장으로서 때로는 직원을 사지로 몰아넣는 결정을 해야 하고 그 선택을 강요해야하는 순간이 있다. 상황발생 소식을 접한 후 구조대원 투입을 결정하고 결과를 기다리는 동안, 위험 속에서 애타게 구조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과 그 속에서 목숨을 내놓고 고군분투하고 있을 우리 동료들의 안위에 대한 걱정과 간절함이 가중되는 고통의 시간이 지속된다.
그래서 구조 결과는 성공적일지라도 그 결과를 위해 현장 대원들이 감내해야할 불안과 노고를 세심하게 살피지 못하는 미안함이 늘 아쉽다.

오늘도 생명의 위험이 도사리는 현장에서 묵묵히 수고를 감수하고 있을 각지의 해양경찰과, 그들의 임무완수와 안전한 귀가를 고대하면서 마음 졸이고 있을 가족들에게 감사의 말씀을 드리고 싶다. 그리고 전국의 바다에서 임무를 수행하다 바다의 전설이 되어버린 고 박경조, 이병훈, 권범석, 양춘석, 최명호, 이청호, 최승호, 백동흠, 박근수, 장용훈, 오진석, 김형욱, 박권병, 박영근, 정호종 등 해양경찰의 영웅을 다시 한 번 가슴에 새겨본다.

서승진 남해지방해양경찰청장·치안감

roh12340@fnnews.com 노주섭 기자

Hot 포토

많이 본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