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배’ 12번 언급한 기시다, ‘일본판 소득주도 성장’ 시험대 올렸다

파이낸셜뉴스       2021.10.10 18:47   수정 : 2021.10.10 22:28기사원문
성장·분배 선순환 전면에 내세우며
임금인상·복지확대 추진 시사했지만
日사회 "결국 돈 푸는 것일뿐" 냉랭
금융소득 과세도 부정적 반응 확산
새 내각 출범 이후 주식시장 내리막
"재원마련 모호" "선거용" 비판 커져



【파이낸셜뉴스 도쿄=조은효 특파원】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가 지난 8일 일본 국회에서 첫 소신표명연설을 하면서 '12번'이나 언급한 단어가 있다. '분배'다. "분배 없이는 성장도 없다.

" 일본의 보수 자민당 정권의 리더로서 '강렬하고 뜨거운' 단어를 꺼내든 것이다. 경쟁력과 효율을 핵심으로 한 고이즈미 준이치로 내각의 신자유주의, 유동성 극대화로 경제를 돌렸던 아베.스가 내각의 아베노믹스에 이어, 이번에는 분배와 성장이 선순환 구조를 이루는 '새로운 일본형 자본주의'라는 정책구호를 내건 것이다. "무색무취하다"거나 "존재감이 약하다"는 평가를 받아 온 새 일본 총리의 야심작인 셈이다. 현재로서는 △임금인상 △복지확대 △일명 부자 증세인 금융소득 과세 확대라는 '3종 세트'가 새로운 자본주의의 간판 정책이 될 것으로 파악된다.

일본 사회의 반응은 집권 여당인 자민당의 '좌클릭'에 환호하기는커녕 예상 외로 냉랭하다. "임금인상은 8년9개월간의 아베·스가 정권에서도 이루지 못한 과제요, 복지확대는 결국 국채를 찍어 돈을 풀겠다는 것밖에 더 되느냐"는 얘기다. 수단의 고갈, 과거 정권에서의 누적된 실패 경험, 아직까지 존재감을 드러내지 못하는 총리 개인의 성향 등이 기시다호의 기대치를 끌어내리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분배 깃발을 전면에 흔들고 있어도 일본 일반 유권자를 대상으로 한 여론조사에서 기시다 내각 지지율이 50% 안팎에 불과한 실정이다. 최근 20년래 아소 다로 내각(2008~2009년) 다음으로 두 번째로 '인기 없는' 내각 출범 지지율이다.

일단 화두는 던져놨다. 아베노믹스의 '재탕, 삼탕'이 될지, 일본 경제에 새로운 길을 만들어낼지 기시다 내각이 혹독한 시험대에 올라섰다.



■'일본판 소득주도 성장'…디플레 탈피 노려

기시다 총리는 코로나19 충격이 가속화시킨 중산층을 복원하겠다며 '레이와판 소득배증'을 제시하고 있다. '레이와'는 나루히토 일왕 즉위 후 사용하고 있는 일본의 연호다. '소득배증'은 일본 고도성장기였던 1960년, 온건보수 성향의 파벌인 고치카이(기시다파)를 창설한 이케다 하야토 전 총리(재임 기간 1960~1964년)가 "10년 내 국민소득을 2배 이상 늘리겠다"며 '성장'(연평균 9% 목표)에 페달을 밟으며 외쳤던 구호다. 60년이 지난 현재 고치카이 출신 총리가 이번엔 '분배'에 방점을 찍은 레이와판 소득배증을 내건 것이다.

현재 일본의 대졸 초임 평균 월급여를 들여다보면 통근수당을 포함해 22만6000엔(후생노동성 2020년도 기준)이다. 상여금 등을 제외하고, 12개월로 단순 합산하면 대졸 초임 평균 연봉은 271만2000엔 정도다. 지난 8일 원·엔 재정환율 기준으로는 약 2900만원이다.

최근 한국경영자총협회는 이런 수치에 기반해 한일 대졸 초임을 비교했는데, 한국이 일본을 역전했으며 기업의 규모가 클수록 이 격차는 커진다고 발표했다. 일본이 초임 수준은 낮아도 승진, 호봉 등에 따라 한국에 비해 인상 폭은 크다고는 하지만 한때 세계 2위 경제력을 자랑했던 일본의 임금 수준치고는 결코 높다고 할 수 없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따르면 주요국 근로자들의 평균 연봉은 2000년 이후 10~40% 올랐지만, 일본만 제자리 수준이거나 뒷걸음쳤다. 달러 환산 기준으로는 한국보다도 10% 낮아졌다. "일본의 임금 수준이 신흥개도국에 가까워졌다"는 탄식이 일본 경제전문가 사이에서 나올 정도다. 잃어버린 30년간 진행된 디플레이션(경기침체 속 물가하락)의 결과물인 셈이다.

아베 내각 역시 디플레이션 탈출을 위해 임금인상, 즉 '성장과 분배의 선순환'을 시도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아베 신조 전 총리는 재임 당시 일본 재계에 매년 수치까지 제시하며 임금인상을 압박했다. 이른바 '관제춘투'다. 매년 봄 일본 노사가 진행하는 임금협상(춘투)에 정부가 개입한다는 의미다. 이는 아베노믹스의 대가였으나 임금인상은 기대치를 밑돌았다. 돈을 찍어 경기를 부양했지만 성장의 과실이 부유층과 기업에만 집중되고 소득격차는 개선되지 않았다. "결국 국가부채를 늘려 부유층의 주머니만 늘린 것 아니냐." 아베노믹스의 한계점이 노정된 것이다.

기시다 총리는 임금을 올리는 기업에 세금을 지원해주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으나 일본 재계가 과연 뜻대로 움직여줄 것인가 현재로선 회의적이다. 이 때문에 좀 더 정교하고 과감한 수단이 동원돼야 할 것이란 지적이 나온다.



■부자증세…"1억엔의 벽을 깨자"

기시다표 분배의 또 다른 간판정책으로는 금융소득 과세다. 일본의 급여소득 과세는 누진세율에 따라 최고 45%다. 하지만 1억엔(10억7000만원) 구간을 넘긴 고소득자의 세금부담률은 되레 감소하는 역전현상이 발생하고 있다. 금융소득 과세율이 일률적으로 20%로 정해져 있어 급여소득 외에 주식 등 금융투자수익이 많은 고소득자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한 구조이기 때문이다. 니혼게이자이신문에 따르면 일본의 2019년 기준 소득세 부담률은 연간 소득 5000만엔(5억3500만원)∼1억엔(10억7000만원) 구간에서 27.9%로 정점을 찍은 뒤 그다음 소득구간에서는 서서히 하락해 소득 10억엔(107억원)∼20억엔(214억원)에서는 20.6%, 100억엔(1070억원) 이상이면 16.2%로 떨어지는 역진적(소득이 낮은 사람이 세금을 더 부담) 구조다. 기시다 총리는 분배재원 확보이자 재정확충을 위해 일률 20%인 금융소득 과세 부담을 높여 "1억엔의 벽을 깨겠다"는 구상이다.

하지만 좋은 취지가 반드시 좋은 결과를 낳는 것은 아니다. 주식시장은 새 내각 출범 이래 내리막이다. 글로벌 증시 여파도 있지만 금융소득 과세에 대한 부정적 반응 때문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아베노믹스가 키워놓은 주식시장 불씨마저 꺼뜨릴 수 있다는 것이다.

■선거용 전락 위험

이런 우려 속에 기시다 총리는 일본 소득주도 성장론의 사령탑이 될 '새로운 자본주의 실현회의'를 이달 중 가동시키기로 했다. 또 지난 8일 11월 발표를 목표로 내각에 수십조엔 규모의 새 경제대책 마련을 지시했다. 이를 뒷받침할 보정예산(한국 추가경정예산)도 연내 편성될 전망이다. 주로 코로나 충격을 보완하기 위한 가계와 기업에 대한 현금급부 또는 금융지원이 주가될 것으로 분석된다. 지방 경제 및 외식 소비 활성화를 위한 정부의 직접보조금 정책인 '고 투 캠페인'도 재가동 수순을 밟고 있다. 도쿄의 한 소식통은 "고 투 캠페인을 재개한다고만 발표해도 일본 지방 각지 지지율은 상승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기시다표 소득주도 성장론에 대한 경제전문가들은 중산층 복원의 필요성은 인정하면서도 "재원 마련이 구체적이지 않다" "모호하다"거나 "선거용 돈풀기에 그칠 것"이라고 보는 시각이 많다. 가즈오 미즈오 일본 호세이대 교수는 일본 언론에 "아베노믹스도 잘해야 고작 2% 성장이었다"면서 "정부는 기업의 이윤을 구미 선진국 수준으로 올리라고 하면서 노동소득 분배율도 올리라는 것은 결국 말장난 아니냐"고 강하게 비판했다.

오는 31일 일본 총선(중의원 선거)은 '아베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기시다 총리가 자기 정치를 하기 위한 첫 승부처다. 도쿄의 한 경제전문가는 "아베노믹스가 이루지는 못했으나, 중요한 과제인 규제개혁은 현재 전혀 거론되지 않고 있다"며 "분배를 위한 재원은 결국 국채발행 확대로 마련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일본 재무성 관료들은 이미 기시다표 소득주도성장론이 재정건전성을 더욱 악화시킬 것이라며 비판의 목소리를 내놓고 있다.

재무성 야노 고지 사무차관은 지난 8일 발매된 일본 월간지 문예춘추 11월호에 기시다 총리가 지시한 새 경제대책에 대해 "선심성 정책론"이라며 "이대로 가면 국가재정이 파탄할 가능성이 있다"고 작심 비판했다.
현직 차관이 공개적으로 새 내각의 경제정책에 반기를 든 것으로, 대단히 이례적인 일이다.

일본의 국가부채는 아베·스가 정권 8년9개월간 폭증하면서 국내총생산(GDP) 대비 두 배 수준(225%)인 1200조엔을 넘어섰다. 일본 정부는 '2025년에 재정수지를 흑자화한다'는 목표를 내걸었지만, 재정건전성으로 가는 '출구'는 더 멀어질 수밖에 없을 것으로 관측된다.

ehcho@fnnews.com 조은효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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