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년 전 만난 에리트레아 장관

뉴스1       2022.03.17 12:00   수정 : 2022.03.17 20:13기사원문

우크라이나 국기 / 사진출처 = 위키피디아


영화 '해바라기' 포스터.


에리트레아 국기 / 사진출처 = 위키피디아


아프리카 대륙의 에리트레아 / 지도출처 = 위키피디아


헨리여권지수 최상위국


헨리여권지수 최하위국


(서울=뉴스1) 조성관 작가 =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사태로 인해 세계인은 여러 가지 새로운 사실을 배워가는 중이다. 국기의 노란색이 우크라이나 들판의 해바라기밭 지평선을 상징하는 것이며, 우리가 별생각 없이 쓰던 지명 키예프는 러시아 말이고 우크라이나 말로는 '키이우'라는 사실도 이번에 알게 되었다.

광활한 우크라이나 들판에서 생산되는 해바라기씨 기름이 세계 생산량의 54%에 달하며 금액으로는 4조6000억원에 이른다는 것도(2020년 기준). 소피아 로렌이 출연한 영화 '선플라워'의 배경이 우크라이나였다는 기억도 다시 소환되었다.

블라드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정신 상태를 분석하는 '휴브리스 증후군'이라는 용어도 언론에 등장했다.

UN은 긴급특별총회를 열어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규탄하는 결의안을 압도적인 찬성으로 채택했다. 기권표를 던진 35개국을 제외하고 규탄결의안에 반대표를 낸 나라는 5개국. 러시아, 북한, 시리아, 벨라루스, 에리트레아. 북한, 시리아, 벨라루스 3개 나라는 누구나 예상한대로다.

그런데 에리트레아(Eritrea)는? 대부분의 미디어에서 에리트레아에 대한 짧은 부연 설명을 달았다. 독자들이 '그런 나라도 있었나'하는 반응을 보일 테니까.

나는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 에리트레아를 검색해 위치를 확인했다는 게시물을 여러 개 발견했다. 에리트레아는 이번 베이징 동계올림픽에도 참가했지만 참가국 수가 200개국이 넘다 보니 대다수의 기억에 남지 않았다.

WHO 회원국 중 백신 접종을 못 한 두 나라

그 에리트레아가 지난해 말 코로나19 백신과 관련 글로벌 뉴스에 잠깐 오르내린 적이 있다. 세계보건기구(WHO) 사무총장 테드로스의 고향이 에리트레아다. 친중국 성향의 테드로스는 코로나19 팬데믹 초기 중국을 두둔하는 발언으로 자주 구설수에 올랐던 인물. 코로나19 팬데믹이 아니었다면 보통 사람이 WHO 사무총장 이름을 기억할까. 코로나19가 하루빨리 종식되길 바라는 간절함으로 세계인은 테드로스의 입을 2년 넘게 주시했다.

테드로스는 1965년생이다. 그가 태어났을 때 '에리트레아'라는 나라는 존재하지 않았다. 에리트레아는 에티오피아의 한 주(州)였다. 그가 열여덟 살 때 에리트레아 주가 에티오피아로부터 분리돼 독립국이 되었다.

에리트레아가 지난해 말 뉴스를 탄 것은 WHO 회원국 194개 국가 중 북한과 함께 백신 접종을 시작하지 않은 유이(唯二)국이었기 때문이었다. WHO 사무총장의 고향에서 아직 백신 접종을 시작조차 못 했다는 믿기 어려운 뉴스를 접하면서 나는 에리트레아와 관련한 오래된 장면 하나를 떠올렸다.

내가 에리트레아 라는 국가의 존재를 처음 안 것은 1998년 여름이었다. 그해 8월 초 나는 여름 휴가를 가족과 함께 경주 보문단지 안에 있는 현대호텔로 갔다. 나는 그즈음 매년 여름 경주 현대호텔에서 여름 휴가를 보내곤 했다.

컨벤션 룸 앞의 긴 복도 소파에서 쉬고 있었다. 얼마 뒤 내 맞은편 소파에 흑인 남자가 앉았다. 키는 175㎝ 정도. 피부는 캐러멜색. 행색은 추레했다. 남자는 무슨 미팅에 참석하기 위해 기다리는 것 같았다. 직감적으로 왠지 내가 '아는 나라' 사람 같지 않았다.

'저 사람은 어느 나라 사람인데 경주까지 왔을까?'

호기심을 참지 못한 내가 명함을 건네며 말을 붙였다. (기자 직업은 이런 점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롭다.)

"저는 신문사 기자인데 휴가 중입니다. 실례지만 어느 나라에서 오셨는지요?"

"에리트레아에서 왔습니다."

내가 알아듣지 못하니까 다시 설명했다.

"알지 못할 겁니다. 독립한 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에티오피아 바로 옆에 있는 나라입니다."

그가 자신의 명함을 건넸다.

장관(minister)이라는 직함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하도 오래전이어서 부처 이름은 확실하지 않지만 경제부처 장관이었다는 것만큼 분명하다.

"장관님이시군요?" 하며 내가 놀라워하자 그는 에리트레아에 대해 부연했다.

"에리트레아는 아주 가난한 나라입니다. 그래서 한국을 배우러 왔습니다…."

다음 말은 생각나지 않는다. 휴가를 다녀오고서 몇 해 동안 나는 그의 명함을 만지작거렸다. 이메일이라도 보내볼까 하다가 결국 보내지 않은 채 시간이 흘렀다.

하지만 아프리카 지도를 볼 때마다 나는 소말리아 위쪽, 에티오피아 오른쪽, 홍해 연안의 에리트레아를 보며 그 장관을 떠올리곤 했다. 아마 오래된 명함첩을 찾아보면 그때 받은 명함이 나올지도 모른다.

24년이 지났는데도 경주 현대호텔에서 만난 에리트레아 장관의 표정이 마치 어제 일처럼 눈앞에 생생하다. 그가 자기 나라를 설명하면서 부끄러워했던 표정이 역력해서다.

그 에리트레아가 작년에는 백신 미접종 국가로, 이번에는 러시아의 침략을 옹호하는 국가로 이름을 올렸다. 에리트레아가 독립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그 나라 장관을 경주에서 우연히 만났다.

위키피디아를 들어가 에리트레아를 검색해보았다. 인권침해국가이자 언론자유가 없는 나라 독재 국가. '아프리카의 북한'으로도 불린다. 아페웨르키가 29년째 장기 집권 중인 에리트레아는 세계 최빈국에 포함된다.

오타와에서 만난 베냉 외교관

그러고보니 나는 1994년에 아프리카 대륙의 동쪽 연안의 베냉 외교관도 만난 적이 있었다. 1994~1995년 캐나다 토론토에 파견 나가 있을 때였다. 오타와를 여행하던 중 우연히 버스를 기다리다가 베냉(Benin)의 외교관과 인사를 나누게 되었다.

세계 지리에 밝은 편인데도 베냉이라는 나라는 금시초문이었다. 내가 신분을 밝히고 명함을 건네자 그도 자신의 명함을 건넸다. 캐나다 주재 베냉공화국 대사관의 1등 서기관. 1등 서기관인데도 그는 궁티가 줄줄 흘렀다. 우리는 버스를 타고 가며 옆자리에 앉아 제법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그는 한국(South Korea)을 알고 있었다.

"서울올림픽이 열린 걸 알고 있다. 베냉에 한국 태권도가 있다. 그리고 문 릴리전 신도도 많다."

문 릴리전? 나는 잠깐 '문 릴리전'(Moon religion)을 알아듣지 못했다. 잠시 뒤에 깨달았다. 통일교였다. 통일교는 아프리카 같은 외국에서는 창시자 문선명의 성(姓)을 따 문 릴리전으로 불린다. 베냉을 아는 사람이 없다면서 그는 '사우스 코리아'를 부러워했다.

1961년, 한국의 1인당 국민 총생산(GNP)는 82달러. 아프리카 가봉과 비슷한 세계 최빈국이었다. 1960년대 초 한국은 희망이 없는 나라처럼 보였다. 한국에서 자유민주주의가 이뤄지는 것은 쓰레기통에서 장미꽃이 피는 것과 같다고 외국 기자가 조롱한 것도 이 무렵이었다. 그런 한국이 20년 뒤에는 완전히 다른 나라로 탈바꿈했다.

1990년대 중반까지 한국을 세계에 알린 것은 태권도, 통일교, 88서울올림픽이다. 이러던 것이 1990년대 후반부터 양상이 완전히 뒤바뀌었다. 삼성전자·LG전자, 2002한일월드컵 4강, 케이팝(K-POP)으로 한국은 세계에 각인되었다. 한국은 2차세계대전 후 독립한 국가 중 가장 성공한 나라로 박수받는다. 이제 한국인은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한국'에 대해 길게 설명할 필요가 없고, 더군다나 에리트레아 장관처럼 창피함을 느끼지도 않는다.

지난해 말 탈북민 출신 조선일보 김명성 기자가 쓴 '대한민국 여권의 힘'이라는 칼럼을 읽고 충격을 받았다. 김 기자의 고향은 함경남도 함흥이다. 1999년 탈북해 2002년 한국에 입국했다. 한국에서 태어난 사람 대부분은 '대한민국 여권의 힘'이 의미하는 바를 실감하기 어렵다. 이 글에는 북한 여권을 가져본 적이 있는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절절함이 배어 있었다.

국제사회에서 한 나라의 국가적 위상을 드러내는 여러 가지 지표가 있다.
그중 하나가 헨리여권지수(Henley Passport Index : HPI). 199개국 중 특정국가의 여권 소지자가 비자 없이 방문하거나 무비자로 갈 수 있는 국가가 얼마나 되는지를 합산해 순위로 매긴 것이다. 1위는 일본과 싱가포르로 192개국. 2위는 독일과 대한민국으로 190개국. 한국은 미국·영국·스위스·호주·캐나다·프랑스보다도 순위가 높다. 최하위권은 에리트레아 100위, 북한 104위, 소말리아 106위…. '북한 려권'으로 갈 수 있는 나라는 39개국.

24년 전 경주에 만난 에리트레아 장관은 한국에서 무엇을 배우고 돌아갔을까.



* 외부 필진의 글은 뉴스1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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