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창남 비행 100주년
파이낸셜뉴스
2022.08.25 18:16
수정 : 2022.08.25 18:16기사원문
서울 인구가 22만 정도였으니 시민의 4분의 1이 이 광경을 보려고 모인 셈이다.
금강호는 남산과 창덕궁을 돌아 여의도로 돌아와서는 고공 묘기를 선보였다. 안창남은 식민지 조국의 영웅으로 떠올랐다. 청춘가를 개사한 "떴다 보아라 안창남 비행기"라는 노래가 들불처럼 번졌다. "내가 어떻게 몹시 그리워했는지 모르는 경성의 하늘! 내 몸은 그저 심한 감격에 떨릴 뿐이었습니다." 안창남은 1923년 1월 '개벽'에 '처녀비행'의 심정을 이렇게 썼다.
안창남은 우리나라 최초의 조종사는 아니다. 1919년 중국 육군항공학교 조종사 훈련과정을 수료한 서왈보(1886~1926)가 최초라고 한다. 그는 중국 군벌의 조종사로 일하다 의열단에 가입해 독립운동을 벌였다. 안창남도 뒤를 따랐다. 관동대지진 이후 일본을 탈출해 독립운동에 몸을 바쳤다. 대한독립공명단원으로 활약하며 일본군 진영에 폭탄을 투하하기도 했다.
영웅박명(英雄薄命)이랄까. 안창남은 불의의 사고로 일찍 세상을 떴다. 1930년 4월 2일 비행교육 중 추락한 것이다. 이역만리 타국에 묻혔지만 묘를 찾지 못하고 있다. 2001년 정부는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안창남의 고국 비행 100주년인 올해 영화 상영회 등의 기념행사가 잇달아 열리고 있다.
tonio66@fnnews.com 손성진 논설위원
※ 저작권자 ⓒ 파이낸셜뉴스,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