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불만 10년...'플리바게닝' 제도화 "안 하나 못 하나"

파이낸셜뉴스       2023.05.21 14:23   수정 : 2023.05.21 18:10기사원문

[파이낸셜뉴스] 시선을 모으는 일부 부패사건 수사마다 검찰과 피의자간 '형량 거래' 의혹이 일면서 '플리바게닝(유죄 협상제도)의 제도화 필요성을 다시 따져봐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검찰은 지난 10여 년간 플리바게닝 제도화를 추진했지만, 오·남용을 우려하는 목소리에 막혀 번번이 실패했다. 추적이 어렵고, 증거 확보가 어려운 범죄가 늘고 있어 플리바게닝 공식 제도화 논의가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플리바게닝 도입 논의만 10여 년째

21일 법조계에 따르면 플리바게닝은 도입 논의만 10여년째 이어지고 있다. 검찰은 최근 이원석 총장의 "플리바게닝에 대한 심도 있는 연구가 필요하다"는 발언 이후 4년 만에 열린 형사법 아카데미에서 플리바게닝을 주제로 다루며 관련 논의에 다시 불을 지피는 모양새다.

플리바게닝은 피고인이 유죄를 인정하거나 공범에 대해 증언하는 조건으로 검찰이 구형량을 낮춰주거나 불기소 처분하는 것을 말한다. 검사 수사 과정이나 기소·불기소 여부를 따질 때 갖는 재량권 안에서 유도할 수 있는 수사 협조를 제도화하자는 취지다. 현행 법 테두리 안에서는 검찰이 낮은 형량을 구형하더라도 판사가 재량에 따라 더 높은 형을 선고할 수도 있어 실효성을 갖기 어렵다. 피의자나 피고인이 혐의를 인정하면 법정에서 더 불리해질 수 있어 '형벌 감면'이라는 유인 없이는 진술을 끌어내기도 쉽지 않다.

검찰은 플리바게닝 도입 이유로 '형사사법의 경제성과 효율성'을 내세운다. 명백한 물증을 확보하기 어려운 사건에 대해선 범죄 가담자에게 사법 협조를 끌어낼 유인을 제공해 수사 효율성을 추구하자는 것이다.

프랑스가 대표적이다. '너무 느린 사법제도'에 대한 불만을 불식하기 위한 제도의 일환으로 유죄협상제와 사법 협조자 형벌감면제도를 도입했다. 프랑스식 유죄협상제는 상대적으로 죄가 가벼운 사건에서 피의자가 자백하면 검사가 감경된 형을 제안하고, 법원 추인을 통해 재판 없이 사건을 종결할 수 있다. 공범 검거에 기여한 가담자에게 형을 감면해 줄 수 있도록 한 프랑스식 사법 협조자 형벌감면제도는 도입 당시 테러 범죄 등에 국한됐다가 법 개정을 통해 일반범죄로 확대돼 활용되고 있다.

■'범죄자와 거래 부적절' 반대 여론 부딪쳐

플리바게닝은 미국, 일본 등에서도 활용되고 있다. 국내에선 지난 10여년간 제도화 여론이 일었지만 '수사와 재판을 거래 대상으로 삼는 것은 부적절하다'는 반대에 거듭 가로막혔다. 거짓 진술을 강요할 수 있다는 오·남용 우려도 컸다. 한상희 건국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증거가 중심이 되는 형사사법 체제가 갖춰지지 않은 상태에서 플리바게닝을 제도화하면 과학수사보다는 피의자·피고인을 윽박지르는 수사로 끝나버릴 가능성이 있다"고 지적했다.

법조계에서는 넓은 의미의 플리바게닝이 이미 활용되고 있다고 본다. 수사 협조자에게 구형량을 낮춰주거나, 재판 진행 과정에서 최대한 피고인 측의 요구를 반영해 주는 식이다. 플리바게닝은 유독 거물급 정치인이 연루된 부패사건에서 부각된 측면이 컸다. 대장동 개발 비리 의혹 수사와 '이정근 녹취록'에서 수사 단서가 잡힌 더불어민주당 2021년 전당대회 돈봉투 의혹 수사가 대표적이다. 유동규 전 성남도시개발공사 기획본부장과 남욱 변호사 등 대장동 일당은 재판에 넘겨진 후 1년 가까이 침묵하다 돌연 태도를 바꿔 이 대표에게 불리한 진술을 쏟아내면서 플리바게닝 적용 의혹이 제기됐다.

사업가로부터 10억원의 금품을 수수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이정근 전 민주당 사무부총장은 1심에서 검찰이 구형한 징역 3년보다 무거운 징역 4년6개월을 선고받으면서 플리바게닝 의혹이 일었다. 검찰은 "정치자금법 위반과 알선수재죄를 묶어 구형한 것인데, 재판부에서 분리해서 판단하면서 검찰이 판단한 것보다 무겁게 나온 것 같다"고 설명했지만, 구형량과 선고형량 간 차이가 커 의혹은 쉽게 가라앉지 않고 있다.

■"달라진 수사환경 고려할 때"

지난 10년간 복잡한 범죄가 늘고, 수사기간도 길어지면서 플리바게닝 도입의 실효성과 부작용을 다시 따져봐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다크웹에서 일어나는 마약·성범죄 사건은 추적이 어려워 조직의 '깃털' 추적에 성공하더라도 '몸통' 규명이 쉽지 않다. 이미 실무상 운용되고 있는 플리바게닝을 제도화해 명확한 기준을 제시하는 방안이 합리적이라는 목소리도 있다.

이경렬 성균관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추적이 어려운 다크웹에서 일어나는 마약·디지털 성범죄 등 조직범죄의 실체를 파악하기 위한 수사 기법으로 현실적인 필요성을 따져볼 때"라며 "형벌 감면을 검사 전권에 맡기지 않고 법관이 참여하도록 하는 등 부작용을 최소화할 수 있는 방안을 함께 고민해야 한다"고 말했다.

clean@fnnews.com 이정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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