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스가 떠난 자리에 남는 것

파이낸셜뉴스       2025.03.10 18:30   수정 : 2025.03.10 18:30기사원문

'젊은이의 양지'와 같은 90년대 인기 드라마에 흔히 등장하던 장면이 있었다. 이른 아침 시골의 한 버스 정류장. 스무 살 안팎 청년이 비장한 표정으로 차에 오른다. 청년은 서울 가서 뭔가 해볼 요량으로 고향을 떠난다.

버스가 출발하면 다시 텅 빈 정류장만 남는다. 돌아오는 사람보다 떠나는 사람이 더 많은 쓸쓸한 풍경이, 멀어지는 버스 소음 속에 뒤로 남는다.

청년들이 고향을 떠나 수도권에 몰리는, 이른바 이촌향도(離村向都)에 대한 경고가 시대의 메시지였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이마저도 사치다. 지금은 떠나는 정도가 아니라 소멸을 마주하고 있어서다.

정부가 인구감소지역으로 지정한 89개 시군구에서 최근 3년간 인구가 3.51% 줄었다. 같은 기간 전국 인구 감소율 0.82%의 네 배가 넘는 수치다. 태백은 그중에서도 가장 심각하다. 무려 7.34%나 줄었다. 비인구감소지역의 감소율이 0.54%에 그친 것과 비교하면 천지 차이다. 정부가 매년 1조원 규모의 지방소멸대응기금을 쏟아부었는데도 이런 속도로 지방은 비워져 간다.

지역소멸은 수도권 집중의 이면이다. 수도권엔 기회가, 비수도권엔 그 기회를 좇아 떠난 사람들이 남긴 빈자리만 남는다. 돈과 일자리가 서울에 갇혀 있는 한 누구도 시골에 눌러앉고 싶지 않다. 아무리 세금 혜택을 줘도 떠나는 지방 인구를 붙들어 둘 수 없다.

지방 살리기란 말은 정치권의 단골 메뉴다. 정권마다 국가균형발전, 지방분권 등 말을 바꿔가며 약속했다. 하지만 지방은 점점 더 살기 어려운 곳이 되고 있다. 점점 많은 학교가 통폐합되고, 의료기관은 적자를 감당 못해 철수한다. 남는 건 노인들뿐이다.

얼마 전 모임에서 귀향했다던 친구 부모님 소식을 들었다. 경기도에서 퇴직하고 시골로 귀농했는데, 5년 만에 서울로 올라왔다고 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병원 한 번 가려면 한나절이었다는 것이다. 초고령사회로 들어선 시골에서 기본적인 의료서비스조차 받기 어려웠던 것이다. 인구소멸지역의 악순환이 이런 식으로 계속된다.

무작정 수도권 규제에만 매달리는 건 오래전부터 효과가 없었다. 이제는 지방에 실질적 경쟁력을 더하는 정책이 필요하다. 재택·원격 근무가 일상화된 코로나 이후 시대엔 적어도 일부 직종에서는 거주지 제약이 사라졌다. 이런 변화를 기회로 삼아 지방이 매력적인 정주여건을 갖추도록 도와야 한다. 질 높은 교육·의료 인프라, 문화생활, 편리한 교통, 괜찮은 일자리가 있어야 사람들이 돌아온다.

지방소멸대응기금을 단순히 나눠주는 방식보다는, 성공 가능성 있는 지역 특화사업에 집중 투자하는 방식으로 전환해야 한다. 거점도시를 육성해 주변 군소도시와 상생하는 모델도 고려할 만하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장기적 안목이다. 인구 정책은 일관된 방향성이 필요하다.

이촌향도는 이미 오래전 시작됐고, 이제는 역전시키기 불가능해졌다. 그럼에도 지방의 완전한 공동화를 막아야 한다. 하나의 거대한 몸에 피가 한쪽으로만 쏠리면 병이 생기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인구감소지역 지정이 시작된 지 이제 3년. 아직은 평가하기 이른 시점이다. 하지만 성적이 그리 밝지 않다는 데는 대부분 동의할 것이라고 본다. 정책을 더 세밀하게 들여다보고 개선책을 마련해야 한다. 매년 1조원씩 투입되는 예산이 단순 소모성으로 끝나서는 해법이 될 수 없다.

아마도 우리는 모든 지방을 똑같이 살릴 수는 없을 것이다. 어떤 곳은 인구가 줄어들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 과정이 자연스럽고 점진적이어야 한다.
그리고 남은 사람들이 품위 있는 삶을 살 수 있어야 한다. 소멸위기지역 노인들이 병원도 없고 대중교통도 끊긴 마을에서 외롭게 생을 마감하는 건 국가의 책임 방기다. 청년이 고향을 떠나던 버스. 창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풍경 속에 얼마나 많은 삶의 궤적이 담겨 있었을까. 그 버스가 언젠가는 반대 방향으로도 가득 차기를 바란다.

ahnman@fnnews.com

Hot 포토

많이 본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