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국에서 동반자로...'한국·베트남 수교 주역' 지한파 외교관의 회고
파이낸셜뉴스
2025.05.03 06:10
수정 : 2025.05.03 12:58기사원문
<1> 응우옌 푸 빈 초대 주한 베트남 대사
[편집자주] '人사이드 아세안'은 아세안과 한국을 잇는 주요 인물들을 조명하는 인터뷰 시리즈입니다. 매주 토요일 급변하는 아세안 현장에서 직접 발로 뛰어 담은 현장의 생생한 목소리를 통해 아세안 지역의 새로운 흐름과 기회를 조명합니다. 다양한 한-아세안 교류의 주역들과의 대화를 통해 지역을 읽고, 그 시선을 통해 과거를 톺아보고 새로운 미래를 그릴 예정입니다.
"정부에서 자동차 공부를 하라고 북한을 보냈는데, 갑자기 언어 전문가가 필요하다고 해서 한국어 공부를 집중적으로 하게 됐죠. 그 땐 전쟁 중이라 많은 젊은 친구들이 전쟁터에서 생사를 걸고 싸우는 상황이라 불평할 수 없었죠. 한국어를 공부한 것에 대한 후회요? 전혀 없습니다. "
빈 전 대사는 1992년부터 1997년까지 한국에 머물면서 양국 관계 발전의 기초를 다졌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재임 기간 동안 빈 전 대사는 양국의 경제과학기술협정, 무역·항공협정을 비롯해 이중과세 방지, 문화교류 확대 및 해양 운수·세관에 관한 협정 체결을 주도한 오늘날 한국-베트남 관계의 산파 역할을 했습니다.
빈 전 대사는 1973~1977년 주북한 베트남 대사관 직원으로 근무했으며, 1992~1997년까지는 주한 베트남 대사를 지내며 남·북한 모두 근무했습니다. 주한 베트남 대사를 마친 후에는 영사국 국장(1997년), 해외교민위원회 부위원장(1998년), 외교부 장관 보좌관(2001년), 외교부 차관(2002년), 주일본 베트남 대사(2008~2011년) 등을 역임했습니다. 베트남 외교부 코리안 스쿨의 '대부'이자 대표적인 동북아통(通)으로 퇴직 후에도 다양한 분야에서 자문을 구하는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2022년 한-베 수교 30주년을 기념에 출범한 한-베 현인그룹의 구성원 중 한 명입니다.
30년 앞서 내다본 한-베트남 관계
빈 전 대사는 베트남과 한국이 당시 비슷한 처지에 놓여 협력의 시너지가 날 수밖에 없었다고 강하게 주장했다고 합니다. 당시 베트남 정부는 대대적으로 개혁·개방 정책인 '도이머이(쇄신)' 정책을 추진 중이었으며, 한국도 대(對)공산권 외교인 노태우 정부의 북방외교가 같은 시기에 이뤄지고 있었기 때문이죠.
빈 전 대사는 "베트남이 필요한 기술, 개발 경험, 자본은 한국이 가지고 있었고, 베트남은 한국이 필요한 인력, 자원을 갖고 있어요. 양국의 이해관계가 아주 부합해 협력 분야가 많아 낙관적으로 전망할 수 밖에 없었어요"라며 당시를 회상했다. 빈 대사는 " 근데 지난 30년이 지나면서 이제는 그 당시 저희가 예측한 것보다 훨씬 더 좋아졌네요"라며 미소를 지었다.
어느 정부가 베트남 관계에 큰 기여를 했냐는 질문에 빈 전 대사는 "여야를 막론하고 수교를 한 노태우 대통령 이후 현재까지 모든 대통령 때마다 양국 관계는 꾸준히 발전했다"고 평가했습니다. 특히, 김대중 전 대통령의 경우 당선 이전에 집으로 초청해 베트남 상황에 대해 물어보면서 도이머이 등 개방 정책이 성공할 걸로 기대한다고 말하기까지 했다고 합니다. 최근 양국 관계 발전을 위해서 한국 정부가 좀 더 능동적으로 움직이고 있다면서 한국 정부의 노력에 감사하다고 말했습니다.
"베트남 사업, 과거엔 대우가 지금은 삼성이 가장 잘해"
빈 전 대사는 "고 이건희 삼성전자 선대회장의 한남동 자택에 초청됐습니다. 베트남의 보반끼엣 전 총리가 황인성 당시 국무총리 초청으로 1993년 방문할 당시 이 선대회장이 미국 일정이 먼저 잡혀 있어 총리와의 면담에 참여하지 못했다고 설명했습니다. 당시 베트남 진출 등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 것 같습니다"라고 이 선대회장과의 만남을 회상했습니다.
이 선대회장은 이후 베트남이 1986년 시장경제 체제 전환 이후 고도 성장을 이루는 데 성공했다는 근거로 향후 양국 간 더 큰 경제협력이 진행될 수 있을 것으로 판단해 투자 확대를 결정했습니다. 이후 약 10여 년에 걸쳐 삼성전자 뿐만 아니라 삼성디스플레이, 삼성SDI, 삼성전기 등 전자부문 계열사들이 베트남에 진출했으며 현재 베트남 전체 수출의 4분의 1 가까이 차지하는 등 베트남 최대 외국인직접투자(FDI) 기업으로서 현지 경제에 크게 기여하고 있습니다.
빈 전 대사는 "먼저 진출한 대우의 고 김우중 회장은 베트남을 진짜 열심히 공부하셨다"면서 자주 만났다고 전했습니다. 한-베트남 친선협회에서 활발한 활동을 한 LG가(家)와도 자주 교류했다고 말했습니다.
가장 베트남에서 활동을 잘하는 기업은 어디냐는 질문에 빈 전 대사는 망설임 없이 "과거엔 대우, 지금은 삼성"이라고 말했습니다.
"과거는 잊으면 안 되지만, 조건으로 삼으면 안 돼"
특히, 전·현직 장성 출신들을 비롯해 한국인들의 베트남 전쟁과 관련된 날카로운 질문들이 이따금씩 들어왔다고 합니다.
많은 언론인들이 베트남의 외교 정책 기조인 '과거는 뒤로하고 미래를 향한다'에 많은 질문을 했다고 합니다. 빈 전 대사는 "호치민 주석의 평화와 국제 친선을 중시하는 사상을 계승한 베트남 정부의 일관된 정책"이라고 설명했습니다. 그는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 5개국 중 러시아(구 소련)를 제외한 4개국이 모두 과거 베트남과 전쟁을 치렀습니다. 또 대부분의 인접 국가들과도 역시 과거에 비우호적인 관계를 맺었던 경험이 있습니다. 만약 베트남이 과거의 원한을 지우지 않는다면, 스스로 고립시키게 될 것입니다."라고 베트남의 외교 기조를 설명했습니다. 빈 전 대사는 수 차례 과거와 역사에 대한 기억을 강조하기도 했습니다.
빈 전 대사는 베트남 전쟁으로 베트남에 대해 선입견을 갖고 있던 한국 사람들이 변화하는 모습에도 감명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는 친하게 지내는 한국인 들 중 "베트남 전쟁 참전 용사 등 베트남에 대해 적대적이었던 분들이 베트남에 대해 이해하고 심지어 베트남 관련된 서적을 출판하기도 했다"고 말했습니다. 기자에게도 책 이름을 알려주며 "꼭 읽어보세요, 진짜 내용이 좋아요"라고 반짝이는 눈으로 수 차례 강조했습니다. rejune1112@fnnews.com 김준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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