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워내자 선명해진 '존재'… 父子의 예술은 같은 곳을 비춘다

파이낸셜뉴스       2025.07.25 04:00   수정 : 2025.07.25 21:26기사원문
류경채·류훈 2인전 '공(空)-존'
삼청동 학고재에서 내달 9일까지 개최
아버지는 자연·조화로 생의 가능성 묘사
아들은 불확실성을 전제로 심연에 집중
존재를 해석하는 미묘한 시각차 있지만
'살아 있음'에 대한 본질적 의문은 같아



"류경채가 세계와 인간의 조화를 통해 존재의 가능성을 모색하고, 조형을 통해 질서를 구축했다면, 류훈은 그 조화가 불가능한 세계에서 존재의 불확실성을 드러내고, 질서를 해체함으로써 존재의 내면을 마주한다. 조형 언어의 방향은 다르지만, 두 작가는 형상 너머의 공백을 응시한다. 그 끝에는 모두 '살아 있음'이라는 가장 본질적인 질문이 놓여 있다.

" (학고재 갤러리)

부자(父子)의 혈연을 뛰어넘는 두 조형 언어가 하나의 전시 공간으로 탄생했다. 서울 종로구 삼청동 학고재는 다음달 9일까지 류경채(1920~1995)와 류훈(1954~2014) 부자의 2인전 '공(空)-존'을 개최한다. 회화와 조각, 두 매체가 시대와 세대를 가로질러 서로의 흔적을 공명시키는 자리다.

황해도 해주 출신인 류경채는 한국적 자연주의를 현대적인 감각으로 해석한 작가라는 평가를 받는다. 지난 1949년 제1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에서 대통령상을 받으며 주목받았고 서울대 서양화과 교수와 창작미술협회 회장 등을 역임했다. 1995년 작고 후 금관문화훈장을 수훈했다. 이번 전시에선 '염원 95-2'(1995), '축전 92-5'(1992), '날 82-5'(1982) 등 그의 대표작 15점이 전시된다. 아들 류훈은 실험적이고 해체적인 조형 언어로 존재의 복합성과 심연을 묘사한 조각가로 유명하다. 아버지 류경채가 집중한 자연과 조화의 세계와는 상반된 방식으로 예술을 추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공존의 표상'(1988), '공존-꿈'(2013), '공존'(2022) 등 그의 대표작 24점을 만날 수 있다.

이번 전시 '공(空)-존'은 세대와 시대, 평면과 입체, 조화와 균열 사이의 병치이자 대화다. 공백을 응시하는 두 작가의 시선은 동일한 질문, '존재란 무엇인가'에 대한 서로 다른 해석이다.

류경채가 자연과 조화를 통해 존재의 가능성을 탐색했다면, 류훈은 조화의 불가능성을 전제로 존재의 불확실성과 해체의 감각을 밀어붙였다. 이 전시는 결국, 단순한 부자전이 아닌, 시대가 남긴 흔적과 작가가 구축한 언어, 예술이 계승되는 방식에 대한 하나의 실험인 것이다.

류경채의 대표작인 '날(1985)'과 '염원(1992)' 시리즈는 류경채의 후기 작업에서 중요한 전환점이자 정점의 위치를 차지한다. '날'은 단순히 시간의 단위로의 하루가 아닌, 존재의 시간과 순간의 축적, 생의 흐름을 담아낸 연작이다. 형상적 조각에서 출발해 서정적 추상으로 도달한 그의 조형 언어는 형태는 사라져도 기억과 감정이 화면 속에 끊임없이 흐르는 구조로 완성된다.

'염원'은 류경채의 내면적 소망을 시각화했다. 단순한 추상에 머물지 않고 동양적 순환의 질서를 담는다. 화면의 중심은 원형으로 구성돼 있으며 원은 탄생과 소멸, 순환과 완전함을 상징한다. 여기에 교차하는 선과 색면들이 더해지며, 마치 만다라처럼 중심으로 수렴되는 동시에 외부로 확장되는 이중적인 공간감을 갖는다. 모든 생명이 결국, 하나의 원으로 회귀한다는 철학적 메시지를 담고 있다. '축전(1989)' 시리즈도 류경채의 작업 세계의 집약체이자 완성된 조형 언어를 보여주는 대표작이다. 자연과 인간, 삶과 죽음, 시작과 끝, 빛과 어둠의 순환을 축복하는 형상으로써 삶의 본질에 대한 긍정을 시각화한다.

이에 반해 존재에 대한 다른 해석을 내놓은 류훈은 '공존(1985~2014)' 시리즈를 통해 인간과 자연, 사물 간의 관계에 대한 깊은 성찰을 담았다. 초기 작업은 비교적 직선적이고 기하학적인 구조였으나 점차 곡선과 유기적인 형태로 변주됐다. 기둥 형태의 수직성과 원형, 타원형의 부드러운 곡선이 만나면서 공간 속에 자연스럽게 스며드는 구조를 만들었다.

기둥은 존재를 지탱하는 축으로 기능하고 덩어리는 세계와의 관계성을 상징한다. 주로 청동, 철, 스테인리스, 테라코타 등을 재료로 사용한다. 대체로 단단하면서도 물질적 무게감을 지니지만, 그 안에는 불완전함과 긴장감, 의도적인 비대칭성이 존재한다. 이는 균형과 불균형, 안정과 불안정, 독립과 의존이 동시에 존재하는 상태를 시각화한 것이다. 특히 형태 간의 빈 공간은 작품에서 매우 중요한 요소다. 사이의 틈, 떠 있는 공간, 걸쳐진 형태는 비어 있지만 결코 공허하지 않는다는 평가다. 오히려 그것은 관계의 여백이며, 존재 간의 대화와 긴장, 호흡이 일어나는 공간이다.


과거 류훈은 "완전한 독립도 없고, 절대적인 의존도 없다"면서 "우리는 서로를 통해 존재하고, 긴장 속에서 균형을 이루고, 차이 속에서 조화를 찾는다"고 밝힌 바 있다.

학고재 측은 "공(空)-존은 단절이 아니라 변형된 계승"이라며 "세월의 밀도와 삶의 흔적이 응축된 침묵 속의 대화이자, 비움 속의 충만함"이라고 평가했다. 이어 "이번 전시는 단순히 형상을 만드는 차원을 넘어, 세계와 인간, 자연과 존재 사이의 관계를 새롭게 묻는 예술적 실천을 보여준다"며 "두 작가의 궤적을 따라가며 예술이 시간과 세대를 관통해 어떻게 계승되고 변주되는지를 체험하는 여정이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rsunjun@fnnews.com 유선준 기자

Hot 포토

많이 본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