숫자가 말해주지 못하는 가치
파이낸셜뉴스
2025.08.07 19:09
수정 : 2025.08.07 19:09기사원문
무대서 점수 얻는 것보다
어떤 무용수 될까 더 중요
관객의 마음을 움직일 것
경희대학교 무용학부 학생들 또한 매년 다양한 콩쿠르 무대에 오른다. 누군가는 상을 받고 환한 얼굴로 돌아오고, 누군가는 기대에 못 미친 결과에 마음이 무거운 채 돌아온다. 하지만 결과와 무관하게 무대에 오르기까지의 시간과 노력은 결국 그들의 몸속 깊이 새겨지고, 훗날 고유한 춤이 되어 되살아난다. 문득 그들의 얼굴에서 오래전 나를 떠올리게 된다. 나 또한 그런 시절을 지나왔다. 처음 국제 콩쿠르에서 상을 받았을 때, 마치 모든 것이 다 이루어진 듯 느꼈다. 꿈이 현실이 되고, 긴 노력을 인정받은 순간이었다. 그 자리가 발레 인생의 마침표처럼 여겨지기도 했다. 하지만 돌아보면, 그것은 착각이었다. 그 순간은 끝이 아니라 겨우 '시작'이었다. 콩쿠르는 무용수에게 분명 소중한 '기회'다.
그러나 그 기회는 '부담'이라는 짐도 함께 지고 온다. 어떤 이는 단 한 번의 수상으로 삶의 방향이 바뀌기도 하고, 또 어떤 이는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해 스스로의 춤을 의심하며 흔들리기도 한다. 내가 추는 춤이 충분한지, 이 길을 계속 걸어도 될지 조용히 되묻게 되는 순간들이 있다. 요즘 콩쿠르 심사를 많이 하게 되면서 느끼는 건, 춤들이 점점 비슷해지고 있다는 점이다.
무대에 서기까지 흘린 땀과 떨림을 '등수'라는 숫자로 설명할 수는 없다. 콩쿠르는 춤뿐 아니라 마음까지 시험대에 올려놓는다. 기술과 표현력, 음악성, 무대 위 태도까지 수치로 평가되지만, 가끔은 가장 중요한 것들을 놓치기도 한다.
무대에서 점수를 얻는 것보다 더 중요한 건, 그 과정을 통해 내가 어떤 사람인지, 어떤 무용수가 되고 싶은지 깊이 고민하는 일이다. 춤은 시간 속에 흐르는 예술이라, 그 순간의 진심이 무엇보다 소중하다. 상을 받든 그렇지 않든, 다시 바를 잡고 연습실로 돌아가는 학생들을 보면 나는 그들 안에 진짜 무용수가 자라나고 있음을 느낀다. 흔들려도 무너지지 않고 다시 발끝을 세우는 반복이야말로 무대 위에서 오래 춤추게 하는 진짜 힘이다.
콩쿠르의 결과에 따라 춤을 계속 출 것인가에 대한 의문이 들 때도 있다. 그러나 중요한 건, 지금도 춤을 추고 있다는 사실이다. 등수가 말해주지 못하는 진심, 그것이 무용수의 길을 조금씩 단단하게 만든다.
우리가 춤을 계속 추는 이유는 누군가의 점수가 아니라, 내 안 깊은 곳에 자리한 작고 확고한 열망이다. 그 마음이 있는 한, 무대는 언제든 우리 앞에 다시 열릴 것이다. 누군가는 빠르게 결과를 내고 앞서가는 듯 보일 수도 있지만, 발레는 긴 여정이다. 단단한 마음을 가진 이가 결국 끝까지 살아남고, 그 마음은 언젠가 관객에게 전해져 또 다른 마음을 움직인다. 무대 위에서 춤이 누군가에게 용기와 위로가 되는 순간을 나는 진심으로 믿는다. 그래서 우리는 멈추지 않고 계속 춤을 춘다. 숫자가 말해주지 못하는 따뜻한 가치를 믿으며.
김지영 경희대 무용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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