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이 우리를 집어삼키기 전에
파이낸셜뉴스
2025.08.14 19:00
수정 : 2025.08.14 19:12기사원문
창세기에 등장하는 죄악의 도시 '소돔'과 '고모라'는 주민들의 악행이 극에 달하자, 불과 유황 속에 최후를 맞았다. 의인 10명조차 찾지 못한 도시는 더 이상 회생의 여지가 없었다. 구약과 신약, 코란까지 이 사건을 반복해서 전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악을 방치하면 공동체 전체가 무너진다'는 경고다.
성폭력 범죄도 마찬가지로 심각하다. 경찰청 통계에 따르면 20세 이하 성폭력 피해자는 2020년 7450명에서 2023년 9772명으로 31.2% 늘었다. 특히 13~15세 피해자는 85.5% 급증했고, 6세 이하 영유아 피해도 21.2%나 증가했다. 피해자 상당수는 성인이 되기도 전에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상처를 안고 가는 셈이다. 이렇듯 건조한 숫자 이면에는 무너진 일상과 삶이 존재한다.
그럼에도 법정은 가해자의 사정을 살핀다. 과거보다는 엄격해졌지만 여전히 계획적이지 않았다는 이유, 순간의 충동이었다는 이유, 심신미약 상태였다는 이유로 감형이 가능하다. 이로 인해 '심신미약'과 '우발적 범행'은 어느 순간부터 가해자가 자신을 변호할 때 자주 꺼내는 단골 멘트가 됐다. 피해자가 극심한 트라우마를 겪는 상황에서도, 일부 판례에서는 가해자가 재범 방지교육을 이수하거나 반성문을 제출하는 등 '진정성'을 보였다는 이유로 형을 감경하기도 한다. 피해자의 회복 가능성보다 가해자의 갱생 가능성이 더 크게 고려되는 경우가 있는 것이다.
고대 함무라비 법전의 '눈에는 눈, 이에는 이'는 단순한 복수 명령이 아닌 '죄에 상응하는 형벌'이라는 사회 계약이었다. 가해자의 인권이 피해자의 권리보다 앞서는 순간, 법이 정의의 이름으로 공동체를 지탱할 힘을 잃을 수밖에 없다는 판단이 깔렸다. 형벌이 공동체 붕괴를 막는 마지막 방파제로서 기능한 셈이다.
악행에 대한 처벌이 무뎌진 사회는 스스로를 지킬 기반을 상실한다. 합리적인 처벌은 단순한 응징이 아닌, 피해자와 사회 전체를 향한 최소한의 약속이다. 범죄자에게 재기의 기회를 주기 위해 그 약속을 저버린다면 피해자는 끝내 회복할 수 없는 상처와 공포 속에 남겨지고 만다. 중범죄에 대한 감형 제한 및 양형 강화가 반드시 필요한 이유다.
yesji@fnnews.com 김예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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