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덥지 않을 권리'를 말할 때

파이낸셜뉴스       2025.08.19 19:06   수정 : 2025.08.19 19:06기사원문

눈 뜨기 힘들 정도로 햇빛이 쨍쨍 내리쬐던 한여름날, 동기들과 강원도 여행을 떠났다. 마지막 코스는 유명 전통시장이었다. 하지만 시장에 들어선 지 5분도 채 되지 않아 우리는 녹초가 됐다.

바닥에서부터 올라온 열기가 그대로 갇힌 시장 내부는 거대한 화덕 같았다. 특히 차광막이 따로 없는 입구 쪽 매장은 해가 그대로 들어와 잠깐만 서 있어도 바로 땀이 흘러 내렸다. 간이에어컨 등 더위를 식힐 최소한의 장치도 없었다.

'그래서 입구 쪽엔 사람이 없나 보다'라고 생각한 순간, 깜짝 놀랄 장면이 눈에 들어왔다. 자세히 보니 햇살이 그대로 내리꽂히는 초입 매장의 평상에 상인 아주머니 한 분이 온몸에 신문지를 뒤집어쓴 채 미동도 없이 잠들어 계셨다.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닐까.' 두려운 마음으로 가까이 다가가자 천천히 들숨과 날숨이 이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안도감과 함께 씁쓸함이 밀려왔다.

이상기후와 폭염은 더 이상 '뉴스'가 아니다. 매년 찾아오는 살벌한 더위는 일상이 됐고, 한낮에 양산 없이 길을 걷는 데는 용기가 필요하다. 더위는 이제 불쾌감을 넘어 생존의 문제로 연결된다. '덥지 않을 권리'를 말해야 할 때다.

헌법 제34조 1항은 "모든 국민은 인간다운 생활을 할 권리를 가진다"고 규정한다. 추상적인 이상 타령이 아니다. 국민 누구나 이 같은 생활을 영위하기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조건을 보장하겠다는 국가의 약속이다. 또 헌법 제35조 1항은 "모든 국민은 건강하고 쾌적한 환경에서 생활할 권리를 가진다"고 명시한다. 폭염으로부터 안전할 권리, 즉 '덥지 않을 권리'는 헌법으로 보장되는 기본권이다.

그러나 현실은 여전히 권리의 언어에 미치지 못한다. 냉방시설 확충이나 쿨링존은 골목상권과 거리의 노동자들에게는 아직 먼 세상 이야기다. 폭염이 일상을 파괴하고 있는 모든 지점에 국가의 눈길이 닿기는 어렵다. 비정상의 정상화, 뉴노멀 시대에 위험은 우리가 기존에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발생한다. 그렇기 때문에 현장의 중요성은 커진다.

제도가 움직이려면 목소리가 쌓여야 한다. 참여민주주의는 거창한 정치 담론이 아니다. 폭염 대비책이 미비한 전통시장을 보고 국민신문고를 통해 민원을 신청하는 것. 국가의 눈길이 닿지 않는 문제 상황에 대해 국민 누구나가 문제제기를 할 수 있는 것, 그게 민주주의다. 그 작은 목소리가 모여 권리는 비로소 제도적 장치로 구현된다.


여름은 점점 더 길어지고 뜨거워진다. 올해만의 문제가 아니다. 누구에게나 폭염을 피할 수 있는 최소한의 가림막이 있어야 한다.

localplace@fnnews.com 김현지 생활경제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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