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순이, 그리고 라이따이한

연합뉴스       2025.08.20 06:05   수정 : 2025.08.20 06:05기사원문

[세상만사] 인순이, 그리고 라이따이한

(서울=연합뉴스) 최재석 선임기자 = 가수 인순이(본명 김인순)는 특유의 열정과 긍정의 에너지가 있다. 1957년생인 나이를 무색게 하는 열정적인 안무와 시원한 가창력이 항상 웃는 그의 얼굴과 겹치면 그 에너지는 배가된다. 물론 그 뒤편에는 혼혈 소녀가 사회적 편견과 차별을 이겨내고 한국을 대표하는 가수가 되기까지 수많은 눈물이 있었을 것이다.

그의 인생사와 공명하는 노래는 그만큼 울림이 있다. 누구에게나 용기를 주는 '희망과 도전의 아이콘'이라 더 그를 좋아한다.

[펄벅 인터내셔널 홈페이지 갈무리] (출처=연합뉴스)


인순이가 국제 아동 인권 비영리재단인 미국 '펄벅 인터내셔널'이 주는 '영향력 있는 여성상'의 올해 수상자로 최근 선정됐다. 한국인이 이 상을 받는 것은 2000년 고 이희호 여사 이후 처음이라니 상의 의미가 더 크다. 펄벅 인터내셔널은 "인순이가 많은 상을 받은 가수이자 인도주의자이며, 혼혈·다문화 배경을 지닌 젊은이들의 후원자"라며 "뿌리 깊은 사회적 인종 차별을 극복하고 음악계에서 큰 성공을 거뒀고 고국에서도 널리 이름을 알렸다"고 소개했다. 인순이는 어릴 적 펄벅재단의 어린이 후원 프로그램 도움을 받은 인연이 있는데 후원받던 아동이 수상자의 영예를 안은 것이다.

인순이는 주한미군이었던 아버지와는 몇 번 편지를 주고받았을 뿐 얼굴을 본 적은 없다고 한다. 어머니가 생계를 혼자 책임지다 보니 몹시 가난하게 자랐다. 그는 한국 전쟁 발발 60주년을 맞아 한국전 참전용사들을 초청한 2010년 뉴욕 카네기홀 공연에서 참전 노병들에게 "여러분들은 모두 제 아버님이십니다"라고 말했다. 그때 '아버지'란 노래도 불렀다. 그는 언론 인터뷰에서 아버지의 부재가 고난을 극복하는 동력이 됐다고도 했다.

이번 인순이의 수상 소식은 베트남전 당시 태어난 한인 2세들을 다시금 생각나게 한다. 그는 베트남전과 무관하지만 '전쟁'이나 '혼혈'이라는 상징 이미지 때문일 것이다. 1964년부터 1973년까지 한국군의 베트남 파병 기간에 한국인과 현지 베트남 여성 사이에서 태어난 한국계 혼혈 2세, 일명 '라이따이한'은 부끄러운 우리 역사다. 라이따이한은 베트남어로 '잡종'을 뜻하는 '라이'와 '대한'을 뜻하는 '따이한'의 합성어로, 이들은 전쟁 후 사회주의 국가에서 '적군의 자식'이라는 이유로 차별과 냉대를 받았다.

1975년 남베트남 패망 당시 보도에 따르면 한국 정부는 라이따이한을 한국인과 사이에서 출생한 것이 확인된 경우 교민 철수 행렬에 넣어주기로 했으나 사이공(현 호찌민) 함락이 너무 급박하게 진행되는 바람에 한국 대사관 측이 파악한 교민과 라이따이한의 수보다 훨씬 많은 인원이 탈출을 요청했고, 이 과정에서 일부 사람들이 전혀 무관한 현지인에게 자리를 매매하는 바람에 막상 탈출해야 할 2세들이 탈출하지 못하고 남겨졌다고 한다. (이춘호,'베트남 '라이따이한'에 관한 소고',2018)

미국은 우리와 달랐다. 관련 법을 제정해 1987년부터 베트남에 남겨진 혼혈아와 그 가족의 미국 이민 및 시민권 취득을 허용했다. 그러나 라이따이한은 그 규모에 대한 공식적인 통계조차 없다. 다만 수백에서 수천 명으로 추정할 뿐이다. 적군의 자식이라는 사회적 억압 때문에 신분 노출을 꺼린 이들까지 합치면 그 수는 더 늘어날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설명이다. 일부 언론과 민간 단체에서는 2만∼3만명에 이른다는 주장도 하고 있다.

한국에서 라이따이한이 알려진 것은 1992년 베트남 수교 이후의 일이다. 1994년 기술 연수생으로 한국에 온 박원삼(한국명·당시 25세) 씨가 베트남전 참전용사였던 아버지와 극적으로 상봉하는 일이 있었다. 2002년에는 라이따이한이 한국인 아버지를 상대로 낸 친생자 인지 청구 소송에서 승소해 한국 국적을 취득한 사례가 있었고 이를 계기로 민간 차원에서 이들에 대한 적극적인 지원 방안이 논의되긴 했으나 정부 차원의 체계적인 지원은 없었다. 민간 분야에서도 최근 몇 년 새 관련 연구가 전무하다시피 하다. 관련 민간 단체에서도 최근 베트남전 민간인 피해 진상 규명과 배상 문제에 집중하고 있다.

이재명 대통령, 또 럼 베트남 서기장과 확대 정상회담 (출처=연합뉴스)


새 정부 국무회의 석상에서 라이따이한 문제와 관련된 논의가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관심을 끈다. 행정안전부가 최근 홈페이지에 공개한 국무회의록을 보면 이재명 대통령은 제25회 국무회의(6월10일)에서 법무차관으로부터 비자 정책 설명을 들은 후 "옛날에 미군들이 한국에 주둔했다가 혼혈아들을 많이 낳아서 미국으로 입양하고 그랬는데, 베트남에도 우리 혼혈 2세들이 많은데 그 자녀들에 대한 비자 특례 같은 걸 검토해 봤는지"를 물었다. 제26회 국무회의(6월19일)에서도 이 대통령은 비자 정책 문제를 논의하던 대목에서 라이따이한과 관련해 한국의 베트남전 참전 군인이나 군무원 관련자의 자식이면 한국에서 일해보겠다는 사람에 대해서는 "웬만하면 다 받아주는 것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든다"면서 관련 방안을 검토해보라고 재차 주문했다.

베트남전 파병 시기를 고려하면 라이따이한의 나이는 모두 50대 이상이다. 이들이 한국에 취업해서 일하거나 한국의 아버지가 살아 있을 때 만나려면 시간이 그리 많이 남지도 않았다. 라이따이한을 지원하고, 비자 특례를 주는 것도 좋지만 무엇이든 하려면 우선 베트남 현지에서 그들에 대한 실태 파악이 이뤄져야 한다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은다.
지원 시민단체 관계자는 "그들 대부분이 시골 홀어머니 밑에서 자라서 의무교육만 받았을 정도로 교육 수준이 낮고 취업도 어려워 경제적으로 평균보다 못 산다"면서 "한국에서 작은 돈도 그곳에서는 큰 돈이 되기 때문에 작은 손길이라도 도움의 손길이 계속 이어져야 한다"고 했다. 라이따이한은 우리가 책임져야 할 역사다. 이 대통령이 이 문제에 대한 인식을 공개적으로 드러낸 만큼 정부 차원의 실효성 있는 대책이 나오길 기대한다.

bondong@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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