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미디어의 DNA를 다시 쓰다

파이낸셜뉴스       2025.08.20 18:13   수정 : 2025.08.20 18:29기사원문

주말 저녁, 온 가족이 비디오 가게에 들러 낡은 플라스틱 케이스를 열고 신중하게 영화를 고르던 풍경을 기억하는가. VCR에 테이프를 밀어 넣을 때 들리던 '철컥' 소리와 잠시 화면이 지지직거리며 채우던 노이즈까지, 이제는 필름 카메라처럼 아련한 추억이 되었다. 한때 우리 거실의 주인공이었던 VHS 플레이어부터 CD 플레이어, MP3 플레이어까지. 수십년을 군림하던 기술이 몇 년 만에 사라지는 시대다. 이처럼 하나의 기술이 떠오르고 시장을 지배하다가 다음 세대 기술에 자리를 내어주는 '흥망성쇠'는 자연의 섭리처럼 당연한 법칙이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손에서 놓지 못하는 유튜브와 넷플릭스는 과연 영원할까? 다음 세대의 미디어는 무엇일까? 우리 아이들이 경험하게 될 콘텐츠는 과연 어떤 모습일까? 과거의 기술 전환이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바뀌는 '형태'의 변화였다면, 지금 인공지능(AI)이 일으키는 혁명은 미디어의 '본질'을 바꾸는 차원의 변화이다.

상상해 보자. 주인공의 선택에 따라 내 기분이나 가치관에 맞춰 결말이 달라지는 영화, 내가 좋아하는 화풍과 음악 장르를 입력하면 세상에 없던 뮤직비디오가 실시간으로 생성되는 서비스가 등장한다. 역사 다큐멘터리를 보다가 AI로 구현된 세종대왕에게 직접 질문을 던지고, 아이의 학습 이해도에 맞춰 실시간으로 난이도와 설명 방식을 바꾸는 교육 콘텐츠가 보편화되는 것이다. 이는 단순히 새로운 플랫폼의 등장이 아니라 완전히 새로운 미디어 산업과 서비스가 탄생함을 의미한다.

지난 7월 대한민국 과학의 도시 대전에서 열린 MPEG(Moving Picture Experts Group) 국제표준화 회의에는 삼성, LG, 구글, 애플, 퀄컴, 화웨이 등 글로벌 빅테크를 비롯한 전 세계 600여명의 전문가들이 모여 향후 10년간 미디어 시장 판도를 좌우할 치열한 논의를 펼쳤다. 이들의 핵심 의제는 미디어의 압축, 전송, 소비라는 부분에 AI 유전자(DNA)를 심는 것이었다.

AI가 이토록 주목받는 이유는 명확하다. 4K를 넘어 8K, 가상현실(VR) 등 새로운 콘텐츠는 기하급수적인 데이터 폭증을 유발하는데, 기존 방식으로는 감당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AI는 이 한계상황을 돌파할 유일한 열쇠로, 회의에서는 AI가 영상의 맥락을 이해하고 압축 효율을 극대화하는 기술과 저화질 영상을 초고화질로 실시간 복원하는 기술 등 미래 표준 자리를 놓고 치열하게 경쟁했다.

'AI 업스케일링' 기술이 표준화되면 방송국의 HD 영상 송출만으로도 시청자는 4K 화질을 즐기게 되며, 방송국은 송출비용을 절감할 수 있다. '신경망 기반 압축' 기술은 3D 가상공간, 홀로그램 등 차세대 미디어의 확산을 앞당기는 기폭제가 될 것이다. 결국 AI는 비용 절감을 넘어 기존에 없던 서비스를 가능하게 하는 '창조적 기술'인 셈이다.

이처럼 MPEG 회의는 미래 미디어 시장의 주도권을 잡기 위한 '보이지 않는 전쟁터'였으며, 이 자리에서 대한민국 기업과 연구자들이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AI 시대의 주도권을 잡기 위한 표준화 경쟁은 여러 차원에서 벌어지고 있다. 물론 AI 모델의 학습방식이나 데이터, 안전성처럼 AI 기술 자체를 위한 표준 개발도 중요하다.
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바로 MPEG의 사례처럼 미디어, 제조, 금융 등 기존 산업(도메인)의 기술 표준에 AI를 접목하여 해당 분야의 혁신을 가속하려는 거대한 흐름이다.

따라서 정부와 산업계는 AI 기술 자체의 표준과 더불어 AI를 각 산업에 적용하는 응용 표준 모두에서 주도권을 놓치지 않도록, 10년 뒤를 내다보는 긴 호흡의 전략적 투자가 절실하다. 어떤 표준이라는 토양 위에서 우리의 미래 산업이 꽃피울지 결정하는 작업이 바로 지금, 이 순간에도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손승현 한국정보통신기술협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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